“이러고도 표 달라는 소리가 나와!”
8일 오전 8시경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효자촌 버스정류장. 주민들의 억센 볼멘 목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폭설로 인한 교통대란을 우려해 대부분의 주민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지만 제설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도로가 얼음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버스는 빙판길 사고를 우려, 사람들이 있는 버스 정류장이 아닌 중앙선 부근에 멈췄다. 주민들은 엉금엉금 기다시피 걸어가 버스에 올랐다.
겨우 차에 올라 탄 주민 권모씨(50)는 서울로 차가 접어들자 또 한번 놀랐다. 서울시내 주요 간선도로는 언제 눈이 왔느냐 싶게 말끔히 치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산신도시 주민들도 ‘분노’했다. 좌석버스를 타고 서울 공덕동으로 출근하는 윤상돈씨(31·고양시 일산구 대화동)는 “고양시 구간은 온통 얼음판이었지만 경계를 넘어 서울로 들어서자 소형차도 큰 위험 없이 달릴 정도였다”며 “신도시에 사는 ‘비애’를 느꼈다”고 한탄했다.
20년 만의 폭설이 휩쓴 7일, 수도권 일대의 방재(防災)시스템은 곳곳에서 허점을 드러냈다.
8일 오전 7시 왕복 10차선의 출근길 성남대로는 빙판길을 이뤄 운전자들이 거북운행을 했고 서현역 주변은 미끄러진 차들로 뒤엉켜 통행이 제한됐다. 이날 아침 출근길의 분당∼수서간, 분당∼내곡간 도시고속화도로도 시속 10km 미만의 ‘저속화 도로’였다.
전철과 좌석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이 집중돼 있는 고양시 중앙로 구간은 8일 오전까지도 빙판길이었으며 이보다 두껍게 얼어붙은 이면도로를 거쳐 중앙로까지 가야 하는 많은 시민들은 집 앞에서부터 불편을 겪어야 했다.
행정당국의 늑장 대응으로 폭설에 의한 피해가 커졌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건설교통부 등 관련 부서와 지자체 홈페이지에는 이를 비난하는 메시지가 하루종일 쇄도했다.
KBS보도에 따르면 건설교통부 장관과 수송정책실장 도로국장 항공국장 서울지방항공청장 등 관련 간부들은 유례 없는 폭설에도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7일 오후 늦게서야 사무실에 출근했다. 건교부 주무 국장은 “태풍은 건교부가 관여하지만 눈은 재해대책본부 소관”이라며 7일 오후 5시경 출근했을 정도로 무신경하게 대응했다. 이 때문에 큰 태풍이 올 때면 유관부처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책을 세우던 ‘비상대책반’도 운영되지 않았다.
시민 하성희씨(39·서울 금천구 시흥동)는 “일요일에 전쟁상황에 돌입했는데 육군본부의 해당참모가 ‘예하부대의 당직자와 사단 상황실에서 체크하고 있다’면서 집에 쉬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이번 사태는 정부 위기관리 능력의 현주소를 총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폭설이 예상된다는 일기예보도 6일 오후에 나오는 등 폭설에 대비한 유관기관의 공조체제도 부실했다. 방재시스템도 혼란을 일으켰다. 경기도는 기상청 기상특보에 따라 7일 오전 6시부터 재해대책본부를 운영했지만 각 시군은 자체 계획에 따라 대처, 혼선을 불렀다.
또 상당수 단체장이 집이나 공관에 머물러 전화지시만 하는 등 안이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들이 8일에는 자신들의 행적을 변명하기에 바빴다.
<정연욱·남경현·이동영기자>jyw11@donga.com
▼미국의 폭설 대책…주지사-시장 제설작업 직접지휘▼
미국에서는 대설주의보가 내리는 즉시 주지사 시장 주재로 대책을 강구한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의 경우 눈이 내리기 전에 주요 도로에 염화칼슘 등을 실은 제설트럭을 곳곳에 미리 대기시켰다가 눈을 치운다. 또 주택가에도 제설 차량들이 순회하며 이면도로의 눈을 치운다. 최근 5∼10인치의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고 실제론 눈이 안왔지만 제설차량은 대기했다.
지난해 12월30일 5년 만에 폭설이 내린 동북부 지역도 뉴욕의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 필라델피아의 존 스트리트 시장 등이 비상대책과 제설작업을 진두 지휘했다.
한편 99년 2월 앤서니 윌리엄스 워싱턴시장은 시 당국이 눈과 쓰레기 치우기, 골목길 청소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사과한다며 워싱턴시 가구의 절반이 넘는 10만 가구에 일일이 사과전화를 했다. 그는 녹음메시지를 통해 30초 동안 환경 시정의 잘못을 사과하고 앞으로 최선을 다해 고쳐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전화비용 1만9000달러는 겨울 연휴에 쓰레기와 눈을 제대로 치우지 않은 용역업체로부터 벌금으로 받아 충당했다. 윌리엄스 시장은 재정이 파탄나고 인사권조차 연방의회에 빼앗긴 상태에서 시장에 취임해 재정을 흑자로 전환시켰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