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상품권법 폐지 이후 이렇게 고액 상품권이 새 ‘뇌물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 분위기를 타고 각 백화점에서는 30만, 50만원짜리 고액상품권 매출이 폭발적인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꼬리 잡힐 염려 없는 유가증권〓전자통신장비업체 대표 K씨는 “설을 앞두고 관계기관과 거래업체 등 꼭 성의를 표시해야 할 곳에 ‘섭섭지 않은 골프채’를 구입할 수 있는 상품권을 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는 한 백화점의 골프용품업체와 협의해 혼마, 캘러웨이 등 5개 유명브랜드 가운데 드라이버와 퍼터 1개씩 선택할 수 있게 만든 교환권. 그는 “상품권은 수표와 달리 추적의 염려가 없고 받는 쪽도 심리적 부담이 덜해 좋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서울지검은 하수처리장 시설공사를 따게 해준다며 환경설비업체로부터 10만원권 상품권 46장 등을 받은 혐의로 한국직능단체연합 사무부총장 김모씨(47)를 구속했다. 그는 “상품권을 지자체 공무원, 환경관리공단 임원 등에게 로비용으로 돌렸다”고 진술, 최근 급격히 늘고 있는 ‘상품권 뇌물’의 사례를 잘 보여줬다.
▽고액상품권 인기 ‘빅뱅’〓과소비를 조장하고 뇌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발행이 금지돼 온 고액상품권은 99년 초 경기활성화 명목으로 도입됐다.
유통업체들이 고액상품권(30만, 50만원권)을 처음 발매한 그해의 매출액은 4억여원. 이듬해엔 163억원으로 35배 증가했다. 같은 해 10만원대 상품권의 매출성장률이 25%였던 것에 비하면 폭발적인 인기였다.
올해 들어 설을 앞둔 15일까지 고액상품권의 매출도 지난해 동기대비 250%선의 고성장 행진을 계속중이다.
신세계백화점은 이 기간에 50만원짜리 상품권을 3억여원어치 팔아 지난해 설맞이행사 때의 8배 수준을 기록했다. 백화점 관계자는 “불황으로 중산층이 주로 찾는 10만원대 상품권의 성장률이 둔화된 반면 고액권은 계속 급신장세”라고 소개했다.
롯데백화점에서도 50만원짜리 상품권이 99년 한해 9억여원어치(상품권 매출의 0.24%) 팔렸으나 지난해 12월에는 한달 동안 18억여원어치나 팔려 상품권 매출의 2.75%를 차지했다.
▽상품권 시장의 교란〓가장 손쉬운 상품권 할인장소로 통하는 서울 명동 일대의 구둣방에는 설을 앞두고 하루 평균 100∼500장의 상품권, 구두티켓 등이 유통되고 있다.
한 구두수선업자는 “수백장씩 들고 와 ‘현금화할 수 있느냐’는 요구도 있어 하루 수천만원대의 상품권이 거래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한 묶음으로 거래되는 상품권은 업체의 비자금 마련수단 또는 도난 상품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이들의 얘기.
한국 부패학회장 김영종(金令鍾·숭실대 행정학과)교수는 “사실상 현금과 다름없는 상품권에 아무 규제수단이 없어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유통되고 있다”며 “사회통념상 ‘선물’의 개념을 벗어나는 상품권 유통에 대해선 당장 법적 응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병희·전승훈기자>bbhe42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