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후에 만난 여고생이 ‘나를 포함해 우리 반 여학생의 상당수가 원조교제 경험이 있다’고 하더군요. 서울의 인문계 고교에 다니는 학생이었어요. 정말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원조교제를 하는 이유예요.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 또래그룹에서 왕따당하기 싫어서 같이 했다는 거예요.”
그 아이는 “나는 프로는 아니다”고 했다. 그들 사이에서 프로란 돈벌기 위해 전문적으로 나서는 사람을 일컫는 말. 프로들은 쉽게 번 돈으로 명품 가방이나 옷을 사면서 돈쓰는 재미에 빠져버린다.
“베이비라는 말, 무슨 뜻인지 알아요? 옷 화장품 액세서리 같은 소품 일체를 베이비라고 부른대요. 지하철역 라커에 넣어놓고 학교 끝나면 ‘베이비 보러 가자’하고 친구들끼리 몰려가는 거예요. 화장실에서 옷갈아입고 밤늦게까지 놀러 다니는 거죠.”
모르는 사람은 부모뿐이라며 김씨는 한숨을 쉬었다. 부모들은 자녀가 밤늦게까지 독서실에 있는 줄 알 뿐, 이처럼 ‘이중생활’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임신이나 낙태문제도 심각해요. 일곱명에게서 낙태 얘기를 들었는데 그 중 한 여고생은 누구의 아기인지 모른다고 했어요. 남자친구가 사랑한다, 결혼하자고 해놓고 막상 임신을 하고 나니 안만나 준다는 얘기, 공부밖에 모르던 얌전한 아이인데 단 한번의 실수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어 고민이라는 얘기, 아버지가 재혼을 해서 자기에게 신경쓰지 않는 사이 친오빠한테 성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얘기….”
자신이 듣고 접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김씨의 표정은 마치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아픔을 겪듯, 배신을 당하듯, 외로워하듯.
그가 이렇게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된 것은 ‘로젤’ 고교 순회공연을 시작하며 홈페이지(www.kimjisook.com)를 마련한 데서 비롯됐다.
‘로젤’은 “여자가 공부해서 무엇하느냐”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여주인공 로젤이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은 꿈을 포기하고 무책임한 남성들 사이를 전전하며 성차별 성폭력 낙태 등 삶의 질곡을 겪는 1인극. 90년 공연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3000여회 공연에 90만명 가까운 관객이 보고 간 김지숙의 분신 같은 작품이다.
특히 친구에게 아픈 과거를 털어놓은 뒤 “정말 고맙다. 난 사람이 필요했어. 아무도 내 진실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어”하고 말하는 대단원에선 어김없이 10대 관객들 사이에 눈물바람이 돈다. 공연을 본 학생들이 김씨의 홈페이지에 소감을 올릴 때도 “내게도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대목이 빠지지 않는다. 김씨가 1시간 10분간 혼신의 힘을 다한 연극을 마치고 온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홈페이지에 들러 그들의 말을 ‘듣고’ 답장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E메일이 몇천통 쌓여 있어요. 관극소감도 있지만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는 것도 많아요. 그 아이들의 얘기가 누구에게도 이런 고민을 얘기해보지 못했다는 거예요. 어른들에게 말하면 야단부터 치니까, 어른말을 들어야 한다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강요만 하니까. 그런데 나는 그냥 듣거든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음을 열고서 말이죠.”
원조교제 경험을 털어놓은 여고생도 ‘로젤을 보고 난 뒤 나도 이렇게 흔들리며 살다가는 로젤처럼 망가지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고 스스로 깨닫더라고 김씨는 전했다. 고3때 실습나갔던 직장에서 성차별을 겪었지만 그것이 차별인지도 몰랐다는 한 학생은 연극을 본 뒤 “사회를 바꾸는데 힘을 보태겠다”며 경찰로 진로를 바꾸기도 했다.
"중심을 못잡고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해주는 말이 있어요.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네 삶은 너의 것이다. 부모나 교사도 너를 도와줄 수는 있지만 대신해줄 수는 없다. 결국 네가 책임져야 한다…. 힘들 때는 언니가 옆에 있어 주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지요. 참 평범한 말인데 아이들은 이 말에 기운을 차려요.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어른이 그만큼 없었다는 뜻이죠.”
김씨가 보기에 청소년들이 원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이다. 강요 이전에 자신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 누구나 소중한 사람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것, 네 인생은 네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 그런데 어른이고 아이고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하고 들을 뿐, 정작 중요한 말은 하지 않고 있다. 청소년을 지탄하기에 앞서 비판받아야 할 사람은 어른이라고 지적한다.
“그래도 나는 학교에서 희망을 봤어요. 교사도 학생도 서로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를 모르고 미로 속을 헤매고 있어 안타까워요.”
김씨가 좋아하는 단어는 ‘함께’다. 어려움을 함께 나눈다고 생각하면 미로에서도 출구를 찾을 수 있다. 그동안 성폭력상담소, 참여연대기금 모금공연에 나선 것도 연극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올해가 연극 입문 25년째. “2004년까지 고교 순회 공연을 계속하면서 청소년의 마음을 어루만지겠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신기(神氣)가 비쳤다. 그의 홈페이지엔 푸슈킨의 ‘네가 황제다, 고독하게 살아라’는 글이 써있었다. “너의 자유로운 혼이 가고 싶은 대로 너의 자유로운 길을 가라…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말아라. 네 자신이 너의 최고 재판관이다.”
만남사람=김순덕차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