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방경찰청 기동수사대는 5일 아세톤과 ‘실크인쇄’ 방식을 이용해 유명 인사의 주민증을 정교하게 변조, 이를 이용해 10억원대의 사기 행각을 벌이려던 김모씨(64) 등 5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자신의 주민등록증의 글자를 아세톤으로 지운 뒤 서울 H대 이사장 김모씨(86)와 서울 강남의 대형음식점 S가든 사장 박모씨(53) 등 유력 인사의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등을 인쇄해 넣는 방법으로 주민증을 변조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또 이를 이용해 김이사장 행세를 하며 김이사장의 땅을 자신들 앞으로 명의 이전하고 그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10억원을 대출받으려 한 것으로 밝혀졌다.
새 주민증이 위조나 변조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지난해 12월 초 울산에서 한 여성이 손톱 매니큐어를 지우려다 아세톤 한 방울이 떨어져 주민증의 글자가 완전히 지워지자 관할 동사무소에 이를 항의하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됐다.
▼변조 실태▼
새 주민증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시중에서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아세톤만으로 글자가 쉽게 지워진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진 이후 주민증 위변조 방식도 훨씬 정교해졌으며 이를 이용한 범죄 ‘스케일’도 커졌다.
과거 ‘종이 주민증’ 시절에는 주민증에 사진을 바꿔 붙이는 단순한 방식의 변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새 주민증이 발급된 이후 다른 사람 주민증이 아닌 자신의 주민증을 이용해 변조하는 방식이 새로 등장했다.
자기 주민증의 사진은 그냥 두고 글자만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꾸는 것. 이 방법은 위조할 사람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등 간단한 신원만 알면 가능한데다 주민증에 실린 사진과 위조범 얼굴이 일치하기 때문에 과거의 변조 주민증보다 더 감쪽같다.
5일 구속된 5명은 실크천에 글자를 새긴 뒤 글자 부분에만 잉크를 통과시켜 인쇄물을 만드는 ‘실크인쇄’ 방식을 개발해 기존 주민증의 글자를 완벽하게 변조해 냈다.
이밖에 이날 광주에서도 미성년자인 박모군(18)이 아세톤으로 자신의 주민증 출생 연도를 고쳐 취업했다가 공문서 변조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구멍난 대책▼
99년 9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실시된 새 주민증 발급 사업은 450억원의 예산이 든 대형 사업. 그러나 주무 부서인 행정자치부는 주민증 위변조에 대해 무성의한 대책으로 일관, 빈축을 사고 있다.
주민증 글자가 아세톤으로 지워진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행자부는 위조 주민증 식별 요령에 관한 전단만을 만들어 전국 경찰서와 읍면동사무소에 배포했을 뿐이다.
또 당시 행자부는 위조 주민증 방지 대책으로 “전화로 주민증의 진위를 확인하는 자동음성확인 전화서비스를 이용하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달 27일 서울에서 30대 4명이 이 시스템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낸 뒤 타인 명의의 신용카드 20장을 발급 받아 수천만원을 쓰는 신종 범죄를 저지르다 경찰에 적발됐다. 행자부의 어설픈 대책이 새로운 범죄를 낳은 셈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현재 주민증의 보호막을 두껍게 입힌다든지 인쇄가 지워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 등을 실험 중이나 이미 수천만장의 주민증이 배포된 뒤여서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이완배기자>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