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기자의 '분업' 경험]처방전이 환자엔 '고생처방'

  • 입력 2001년 3월 14일 18시 49분


의약분업이 시작된 지 몇개월 뒤인 2000년 11월. 서울 근교 A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응급실에 감기환자가 왔다. 간단히 병력을 묻고 열과 호흡 상태를 알아보고 단순감기인지, 다른 질환과 연관된 것인지 알기 위해 X레이 검사를 했다.

38도. ‘음, 열이 좀 있군.’ 콧물과 코막힘이 있었으나 X레이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인후가 많이 부어 있었다. 단순 목감기였다. 곧 처방전을 썼다. 이때 문제에 부닥쳤다.

▼외국약국 15000여종 약구비▼

‘내가 쓴 처방전이 이 사람에겐 구하기 쉬운 약일까?’ ‘뭐, 흔히 사용하고 구하기 쉬운 진통해열제와 항히스타민제를 사용하면 그만이지….’ ‘얼마 전 모제약회사에서 콧물에 부작용없이 잘 듣는 좋은 약이 나왔다고 선전했는데 이 약을 한번 사용해 볼까?’

하지만 곧 포기했다. 환자가 또 찾아와서 한소리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이 약 구하기가 힘들어요. 약국을 몇 군데나 돌아다녔어요.”

다음 환자가 왔다. 이 병원에는 돈 없는 의료보호 환자들도 자주 온다. 이분들이 오면 병원도, 약국도 손해다. 물론 의사 입장에서는 동일하게 환자들을 보게 되지만…. 환자를 손으로 만져보니 왼쪽 하복부에 통증이 있었다. 복부사진도 찍어 장이 많이 부풀어 있는지, 변은 많이 차 있는지 알아봤으나 별문제가 없는 것 같아 원인을 알 수 없는 위장염으로 진단하고 진통제 주사 한대 놓고 진통제와 위장약 처방을 했다. “가까운 약국에 가면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도 했다. 하지만 그 환자는 “약을 구할 수 없다”며 다시 왔다.

의약분업을 너무 서둘러 시행한 것이 문제일까. 프랑스나 미국은 약국마다 1만5000여 종류의 약이 구비되어 있어 큰 불편함이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약국마다 많은 약을 갖다 놓거나 동네 단위로 ‘약국 창고’를 만드는 등의 방법으로 약국이 쉽게 구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미리 마련됐더라면 감기환자에게 맞는 약을 처방하고 환자는 처방대로 약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의약분업으로 국민이 비싼 비용을 지불한 만큼 건강권이 향상됐는지 의문이 든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충분한 돈이 있었더라면 의료보호환자가 마음의 불편함 없이 치료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건강에 대한 투자로 보는 인식이 자리잡는다면 의보료 인상은 필요한 일이다. 사실 몸에 좋다면 몇십만원 하는 한약도 구입하는 것을 많이 보지 않는가. 다만 그 인상의 혜택은 소비자인 국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한편으로 의약분업이 우리 현실에서 과연 필요한가 하고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많이 듣는다. 가장 큰 이유가 불편함이다. 진료, 처방, 조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보료는 올랐는데 거대한 보험재정이 펑크날 위기라니.

▼불편만 늘고 장점 못느껴▼

의사 쪽에서 보면 의약분업의 장점은 엄연히 있다. 환자는 자신의 병에 대한 정보, 투약하는 약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또 장기적으로 의약사의 올바른 역할 정립을 통해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병을 일찍 발견할 수 있고, 약물 오남용을 줄일 수 있다. 결국 놓치기엔 안타까운 제도이다.

그러나 이상과 의약분업의 원칙에 얽매여 ‘1차진료기관〓약국, 2차진료기관〓병의원’이라는 우리의 문화적 전통과 소비자 편의라는 현실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서둘러 제도를 도입한 듯하다. 초기의 ‘시행착오’라고 보기엔 대가가 너무 비싸다.

<이진한의학전문기자>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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