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품 오남용과 의료비를 줄인다는 의약분업이 정권의 핵심 개혁과제로 여겨지면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굴러간 이유는 무엇일까.》
▼당에선 시동 걸고▼
▽거듭된 논란〓의약분업은 김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의보통합과 함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국정 100대 과제에 포함됐다.
보건복지부는 약사법에 명시된 분업 시행 시기(99년 7월1일)가 다가오자 98년 5월 의약계 대표가 참여하는 의약분업추진협의회(분추협)를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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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추협은 3개월 가량 토의를 거쳐 예정대로 모든 의원과 약국을 대상으로 분업을 시행키로 결정했다. 당시 장관은 김모임(金慕妊)씨였지만 분추협은 차관이던 최선정(崔善政)현 장관이 주도했다.
분추협 안은 분업의 전면 실시라는 점에서 60년대부터 논란을 거듭해 온 종전의 분업안과 크게 달랐다. 노태우(盧泰愚)정부의 ‘국민의료정책심위원회’(88년)와 김영삼(金泳三)정부의 ‘의료개혁위원회’(97년)는 단계별 실시안을 냈다.
군사정권도 밀어붙이지 못한 분업은 94년 한약분쟁을 계기로 약사법 부칙에 시행 시기가 94년 7월∼99년 7월로 정해졌다. 부칙만 개정하면 얼마든지 연기가 가능했으나 정부는 추진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약 오남용을 줄인다는 개혁과제에 당정 모두 반대하지 않았다.
▽당에서 시동걸다〓의료계와 약계는 98년 11월말부터 분업을 연기하도록 청원했다. 여기에 시민단체가 반발했다.
김대통령은 12월3일 여당 주도로 의약분업을 추진토록 지시했다. 이에 앞서 국민회의 정책위원회는 같은 해 7월 ‘보건의료 효율화와 선진화를 위한 정책기획단’을 만든 뒤 보건의료분야 정책을 다듬어 12월에 발표했다.
정책기획단은 의약분업을 ‘약품 오남용을 방지하고 조제와 투약이 철저해지는 효과를 훨씬 뛰어넘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약산업과 의약품 유통에 큰 변화를 주고 의보재정 운영을 정상화하며 왜곡된 보건의료 체계를 바로잡는 중대한 계기로 작용한다는 ‘찬사’를 내놓았다.
당시 국민회의 정책위원장은 김원길(金元吉)의원, 정책기획단 의장은 김상현(金相賢)의원, 부위원장은 이성재(李聖宰)의원과 김용익(金容益)서울대 교수였다.
국민회의의 방안은 병원을 강제 분업 대상기관에 포함시키고 주사제도 분업을 적용하는 등 완전분업에 더 가까웠다. 정부의 당초 구상(분추협 안)이 정치권의 영향으로 변한 것.
▼정부선 밀어붙이고▼
▽밀어붙인 복지부〓시민단체와 의약계가 분업안에 합의하자 차흥봉(車興奉) 전 복지부장관은 99년 7월 분업실행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본격적인 준비를 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제’를 99년 11월에 시행하면서 평균 30%에 이르는 약값거품(마진)을 걷어낸 것. 분업과 동시에 시행해도 될 ‘뇌관’을 너무 일찍 터뜨린 셈.
의료계는 분업에 막연한 두려움을 갖다 실거래가 상환제를 계기로 분업 영향을 피부로 느끼면서 장충동체육관 집회(11월), 여의도 집회(2000년 2월)를 가졌고 5월에 한시적으로 집단 휴진했다.
의보제도에 대한 불만까지 겹쳐 의료계가 집단행동을 준비하는 상황에서도 복지부 장차관과 실국장들은 사석에서 의보수가만 올려주면 된다고 사태를 낙관하다 6월 폐업을 막지 못했다.
의료계 파업기간 중 당정 일각에서는 분업을 잠정 또는 무기 연기하자는 주장이 나왔으나 차 전장관은 분업 강행을 주장했고 이해찬(李海瓚)의원 등 국민회의 개혁파는 “여기서 물러서면 모든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버텼다.
<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
▼시민단체도 '개혁과제'로 설정 분업촉구▼
대한의사협회가 99년 2월 국민회의 안을 거부하자 경실련 등을 주축으로 시민단체는 분업안 수용을 강력히 요구했다.
의사협회와 약사회는 시민단체 압력에 밀려 분업을 1년 연기하되 2개월 안에 합의를 끌어내기로 했다. 실제로 이들 두 단체는 99년 5월10일 분업실시에 합의했다. 국민회의 정책기획단에 참여했던 일부 교수들은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의약분업을 개혁과제로 강조했다.
정부도 시민단체도 의약분업의 긍정적 효과만을 강조했지 부작용이나 현실적 토대를 중시하지 않았다. 다소 환상적인 의약분업의 취지나 정책목표만이 강조됐다.
그러나 의료제도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상태였던 의료계는 99년 11월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제’로 약값마진이 사라지자 위기감을 느끼고 정부의 의약분업안에 강력히 반발하며 지난해 5월 이후 휴진과 파업에 나섰다.
당시 여론은 의료계의 파업에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파업이 장기화하자 의보수가를 세차례(지난해 4, 7, 9월)나 인상하며 의료계를 달랬다. 대폭적인 수가인상 등 의약분업이 3조원 이상의 추가 비용을 요구할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면밀한 준비 없이 추진되다 이익단체에 휘둘린 정책의 결말이 어떤지가 불과 8개월 만에 밝혀진 것이다.
<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
▼의약분업 관련 주요 발언▼
△의약분업을 해도 약제비 등이 감소하므로 국민부담은 늘지 않는다.(2000년 6월 차흥봉 보건복지부 장관)→실제로는 부담 폭증
△의약분업으로 1조5000억원 가량의 추가비용 부담이 발생하게 됐다.(2000년 6월 차장관)→4조원 당기 적자
△정부가 집단행동에 밀려서는 안되며 의약분업은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2000년 7∼8월 김대중 대통령)→집단행동에 밀림
△의료계 약계 시민단체 3자 합의사실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시행과정에서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한 준비가 소홀했다.(2000년 9월 최선정 복지부장관)→현실로 나타남
△의약분업 보완대책에 따른 600억∼700억원의 추가 소요재원 등 여건변화가 반영되도록 하겠다.(2000년 9월 이한동 국무총리)→추가재원이 연간 4조원에 이름
△정부와의 대화가 충분치 못해 (의료계가) 소외감과 불신감을 갖게돼 정부로서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2000년 9월 이 총리)→대통령도 책임인정
△조금 안이한 판단을 한 것이 아닌가 반성하고 있다.(2000년 9월 김대통령)→책임인정
△의약분업에 대해 잘 몰랐고 사전준비를 제대로 못했다.(2001년 3월 김대통령)
△올해 건강보험 적자가 3조∼4조원에 이를 것이다.(2001년 3월 박태영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의약분업은 내 책임이 크다. 의약분업에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고 시작했지만 준비가 부족했다는 것을 느낀다.(2001년 3월 김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