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수의 재심청구]주요 증인4명 "경찰이 거짓 강요"

  • 입력 2001년 3월 22일 18시 36분


주요 증인들의 진술조서와 ‘범행시간’(저녁 9시 직전) 추정이 엉터리였음을 입증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안내.
주요 증인들의 진술조서와 ‘범행시간’(저녁 9시 직전) 추정이 엉터리였음을 입증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안내.
정진석씨(가명·67)의 ‘초등학생 강간살인’ 사건은 수사와 재판 내용을 검증해 볼수록 의혹이 많아진다. 주요 증인들은 한결같이 경찰의 강압과 협박에 의해 거짓진술을 강요당했다고 말하고 목격자의 진술도 당시의 객관적 상황과 어긋난다.

▽주요 증인들의 진술번복 이유〓검찰의 공소장과 춘천지법 1심재판부의 재판기록에 나타난 증인은 피해자 장모양(당시 11세)의 같은 학교 1년 후배인 한모씨(39·본보 22일자 A28면 보도)와 정씨의 이웃 주민 이모씨(63·여), 정씨의 만화가게 여종업원 김모씨(46), 사건발생 직후 현장 근처를 지나가던 여고생 목격자 김모(47) 이모씨(46) 등이다. 이밖에 정씨의 아들과 피해자 장양의 어머니, 범행현장을 발견하고 신고한 행인 2명 등이 있다.

기록에 나타난 증언의 내용이나 비중으로 볼 때 주요 증인은 한모씨 등 4명이다. 문제는 한씨에 이어 이웃 주민 이씨와 종업원 김씨 등이 모두 “경찰의 가혹행위와 협박으로 거짓진술을 강요당했다”고 당초 진술을 완전히 번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의 당시 증언이 진실에 부합하고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동안 정씨와의 교류도 없었고 제3자의 ‘강요’도 없다는 점에서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반면에 그 당시 허위증언을 할 정황은 충분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수사기관의 ‘협박’과 ‘강요’다.

▽증인들의 모순된 진술〓이웃 주민 이씨는 사건 당시 경찰과 검찰에서 “사건 발생 8일 뒤에 정씨의 부인이 출산 직전이어서 그 집 빨래를 해준 적이 있는데 정씨의 팬티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씨는 13일 춘천으로 찾아간 취재팀에게 이 진술이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사건 발생 후 며칠이 지나 밤중에 형사들에게 끌려가 파출소 뒷방에서 조사받은 일이 있는데 위압적인 분위기여서 겁이 많이 났다”며 “정씨 팬티를 빨 때 빨간 것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3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60 평생 살아오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은 일이기 때문에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어 “법정에서는 거짓말은 할 수 없고 사실대로 말하면 처벌을 받을까봐 두려워 ‘빨간 것을 봤다’는 말 대신 ‘과일물 같은 것을 봤다’고 둘러댔다”고 말했다.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머리빗이 정씨가 평소 사용하던 것이었다고 증언한 정씨의 만화가게 종업원이던 김씨는 더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17일 충남 천안시 자택에서 “경찰관들이 나를 파출소 뒷방에 가둬놓고 위협할 때의 공포심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사람(정씨)이 죽이는 것 봤냐’고 하면 ‘봤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씨는 “견디다 못해 요구하는 대로 말했더니 그 때부터 경찰관들의 험악한 태도가 바뀌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귀여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때 같이 있던 경찰관 2, 3명이 나를 검찰에 데리고 가 나한테 다짐, 다짐을 해서 검찰에서도 똑같이 진술했다”고 말했다.

또 ‘사건 당일 범행현장 부근을 지나간 뒤 집에서 KBS라디오 밤 9시 뉴스를 들었다’는 목격자 2명의 진술은 9시 뉴스 자체가 없었다는 점에서 당시 객관적 상황과 모순된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형사소송법의 재심요건▼

정진석씨(가명)의 ‘초등학생 강간살인’ 재심청구(99년 11월) 사건에 대해 서울고법의 재판부는 1년4개월째 허가 여부를 놓고 장고(長考)를 거듭하고 있다.

정씨가 고문을 참지 못해 허위자백을 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검찰과 법원은 ‘오판(誤判)’을 한 것이 되고 이를 바로잡는 제도가 바로 재심이다. 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하면 다시 새로운 재판이 열린다.

형사소송법 420조는 재심 사유로 일곱 가지를 들고 있다. 이중 가장 일반적이고 중요한 것은 △증거물 위조 또는 변조 △허위의 증언 감정 통역 번역이 확정판결에 의해 증명된 때 △무죄이거나 형을 감경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새로 확보된 때 등이다.

정씨 사건의 경우 두번째와 세번째 요건이 문제다. 정씨의 변호인단은 “이미 한모씨와 이모씨(여) 등 주요 증인이 당시 허위증언을 했다고 실토했고 이들의 새 증언은 무죄를 선고할 만한 명백하고 새로운 증거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재심을 신청하기 위해 99년 이씨를 경찰에 위증혐의로 고소했다. 경찰은 이례적으로 이씨를 소환 조사한 뒤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허위 증언’이라는 확정판결은 받을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결국 위증 시인 자체를 재심요건으로 보느냐, 또 바뀐 증언을 재심 사유인 새 증거로 보느냐가 현 재판부의 고민인 셈이다. 변호인단은 이와 별도로 조만간 ‘무죄이거나 형을 감경할 만한’ 새 증거를 재판부에 제출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박성호(朴成浩)변호사는 “우리 법은 재심의 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롭고 판사들도 재심에 인색한 경향이 많다”며 “일본처럼 재심 사유인 ‘명백한 새 증거’의 요건을 지금보다 완화해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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