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수 재심청구]"부검 감정서도 무시했다"

  • 입력 2001년 3월 23일 18시 36분


당시 부검의 이양씨
당시 부검의 이양씨
정진석씨(가명·67)의 ‘초등학생 강간살인’사건수사 당시 경찰과 검찰은 사건 다음날 직접 부검을 실시한 외과 전문의의 소견을 무시한 것으로 23일 밝혀졌다.

검경은 그 대신 생물학과 출신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 연구원이 사건발생 14일 만에 제출한 시체 내용물 감정서를 증거로 채택해 정씨를 범인으로 단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씨 사건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경찰은 사건발생 다음날인 72년 9월28일 피해자 장모양(당시 11세·초등 5년)의 시체를 춘천도립병원으로 옮겨 이 병원 외과 과장 이양(李洋·59·현 진주고려병원 원장)씨에게 부검을 의뢰했다. 경찰은 또 이씨의 부검과정에서 장양의 위(胃) 내용물을 병에 담아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다.

이씨는 부검 직후 “장양의 위에 김치와 밥 국수 등 저녁식사 내용물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점으로 미뤄볼 때 식후 30∼50분 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의 ‘사체부검 감정서’를 제출했다.

경찰이 보낸 장양의 위 내용물을 감정한 국과수 연구원 정모씨(당시 33세)는 그해 10월11일 “내용물에서 김치와 고춧가루 밀가루음식 등이 발견됐다”며 “식후 1∼2시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관련기사▼
- 검찰, "나는 억울" 무기수 주장 진상규명 나선다
- [범행시간 의문]"저녁 7시50분전" 소견 무시

장양의 어머니 이모씨(당시 38세)는 경찰에서 장양이 오후 7시 무렵 저녁식사를 했다고 진술했으며 경찰과 검찰은 목격자 증언과 정황 등을 근거로 정씨가 자신의 만화가게에서 오후 8시30분경 장양을 만나 8시50분경 살해했다고 단정했다.

따라서 검경의 수사결과는 국과수 연구원의 감정서를 토대로 했을 때만 가능하며 의사 이씨의 부검 감정서에 따를 경우 공소사실은 근거를 잃게 된다. 검경의 수사기록에 의하더라도 정씨의 당일 행적은 오후 8시까지는 알리바이(현장에 없었다는 증명)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씨는 13일 자신의 진주고려병원에서 본보 기자를 만나 “의사가 된 후 처음 한 부검이라 생생히 기억하는데 사망자 위 안에 음식물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며 “부검감정서 제출이후 경찰과 검찰, 법원에서 소환조사를 받거나 증언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검경이 감정서의 신뢰성에 대한 충분한 검증 없이 범죄입증에 필요한 것만 선택해 ‘짜맞추기’식 수사를 했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한편 국과수 이한영 법의학과장은 23일 “위 내용물의 소화정도는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심하기 때문에 위 내용물을 근거로 한 사망시간 추정은 신빙성이 아주 약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법의학에서는 먼저 위를 열면서 육안으로 음식물을 보고 추정하고 또 심층적으로는 현미경 등을 이용해서 2차적으로 조사하는데 위를 열었을 때 고형물질이 보인다면 사망시간이 식사 후 1시간 이내라고 추정할 수 있기는 하다”고 말했다.

<이수형·이정은기자>soo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