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이비인후과 교수이자 의료포털 벤처기업인 (주)엠디하우스의 CEO 정동학(鄭東學·44)씨는 20년전만 해도 쇳물을 다루던 공원이었다.
99년 10월 창립, 2000년 5월 사이트를 오픈한 엠디하우스(www. mdhouse.com)는 의사를 위한 의료정보 포털사이트를 표방한다. 의학 한의학 치의학 약학 간호학 등 100여명의 전문 의료인들이 각각의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40여개 학회의 학술논문을 데이터베이스화했으며 일류의사들의 수술현장을 다큐멘터리처럼 볼 수 있는 동영상 자료도 갖추고 있다. 자본금 20억원에 회원수가 1만7544명. 우리나라 의사 5만여명중 30% 가량이 모인 이 곳에선 지금 의료재정 파탄에 관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제가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꼭 무엇을 해내겠다는 성취욕이 있다기 보다는 새로운 일을 찾고, 밤잠 안자며 애를 쓰고, 그래서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과정을 즐깁니다. 그러다보니 가만히 안주하지를 못하는 편이지요.”
그는 경기 양주 근처 회암리라는 시골에서 장사하는 부모밑에 평범하게 자랐다. ‘기술입국(技術立國)’을 부르짖던 박정희대통령 시대, 가난하고 똑똑한 젊은이들이 공업고교에 들어가면 특례보충역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그 무렵에 나왔다. 서울 성동공고 금속과에 특례보충역 2기로 입학했다. 금속과에선 금이나 은을 만지는 것으로 알만큼 순진했었다.
▼학력의 벽 극복하기 힘들어▼
졸업 후 포항제철에 입사해 섭씨 1500도로 뜨겁게 끓어오르는 용광로 앞에서 알루미늄 방열복에 무거운 투구를 쓴 채 쇳물과 씨름했다. 힘들었지만 어느 직업이나 다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쇳물만 딱 보면 오차 5도 안팎으로 온도를 알 수 있고, 고로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이상여부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한밤중에 기계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회사에선 숙소에 차를 보내 그를 불러올 정도로 인정도 받았다.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대우받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어떤 벽을 느끼게 되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 한계를 깰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난 뒤 희망이 없어진거지요.”
대학 갓 졸업한 신입사원에게 공장을 견학시키고 설비에 대해 설명을 해준 것이 엊그제인데, 이삼년만 지나면 그의 상관이 되어 “이것도 일이라고 한거냐”“머리를 바짝 잘라라”고 지시를 해대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 사이 포항전문대(지금의 포항대학)를 졸업하고, 제선기능사 제강기능사 등 자격증을 8개나 따도 월급이 3000원 정도 오를 뿐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신분의 벽을 뚫을 수 없는 변방때리기에 불과했다”고 그는 표현했다.
스물네살 때부터 대학입시 공부를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하루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3년을 그럴 수 있느냐”며 잘 믿지 않지만 스물일곱살에 연세대 의대에 입학하기까지 하루 두세시간씩 자면서 공부를 했다. 공부시작한지 2년째 되는 해, 4년을 사귀던 여자친구가 그의 곁을 떠났다. 지금 입시공부해서 어느 세월에 안정을 찾겠냐면서. (그는 쓰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2년 전 우연히 그 여인을 마주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기다렸다면 지금쯤 의사 사모님인데….” 하더라고 했다)
의사가 되려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슈바이처나 히포크라테스 얘기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솔직했다. “그때는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예비고사 성적에 맞춰 대학을 정했습니다. 전문직이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지요.”
대학 입학 신체검사를 앞두고 심장부정맥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 무리한 탓이었다. 신체검사날 가퇴원을 했는데 의사가 가슴에 청진기를 대는 순간 심장이 ‘갑자기’ 정상적으로 뛰었다. 하늘이 도운 것 같았다.(입학 후 그는 크리스천이 되었다).
▼코성형 수술만 1200여건▼
그는 피나는 노력으로 꿀벌의 길에서 벗어났으나,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꿀벌이 되지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꿀벌의 역할도 엄연히 필요한 것이 사람사는 사회이므로. 옛 직장에선 “우리와 함께 쇳물 다루던 동료가 대학가서 지금은 의사가 됐다”는 게 전설처럼 내려온다지만, 혼자만의 노력으로 학벌의 벽을 깨고 나온 그를 성공의 표상인 듯 세우는 것도 착잡한 노릇이다. 모두들 대학, 그것도 일류대학에 가려고 기를 쓰는 것도 이런 사회구조 때문이 아닌가. 정교수도 인정했다.
“그때 그 직장에서 내가 노력한 만큼 대우받을 수 있었다면 만족하고 지냈을 겁니다. 어찌보면 사회적으로 낭비지요. 학벌과 상관없이 한가지만 잘해도 인정받고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는 포철에서의 8년1개월이 지금의 삶에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고 믿는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1500도로 끓는 용광로 앞을 생각하면 힘들 게 없다. 마음을 먹는 것이 어렵지, 일단 뜻을 정하고 나면 못해낼 것이 없다는 의지력도 직장생활이 준 선물이다.
게릴라정신을 지닌 그는 이비인후과 중에서도 코성형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정교수가 코성형을 전문분야로 택할 때만 해도 이 분야는 성형외과 의사들의 독무대였다. 지금까지 그가 성형한 환자가 1200여명. 코성형 워크숍을 매년 열고 있고 20여편 논문도 냈다. 동양인에 알맞는 코 모델을 학문적으로 세우는 것이 목표다. 돈에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개업은 생각지 않고 있다. 어차피 돈은 바닷물과 같은 것.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이 생기는 바닷물처럼, 돈이란 것도 가질수록 끝모르는 욕심에 허덕이게 된다고 믿는다.
“더 큰 병에 걸렸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코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새벽기도갔다가 트럭에 치어 코가 아예 없어진 아주머니를 고쳐준 적이 있습니다. 갈비뼈를 떼어내 뼈대를 세우고 이마살로 코를 ‘건축’해주었지요. 의사라는 직업은 그래서 좋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베풀면 또 고맙다는 소리 듣지 않습니까.”
▼희망을 일궈가는 과정이 행복▼
98년과 99년 코에 관한 홈페이지를 열었다. 그때만 해도 인터넷에 관심갖는 의사들이 많지 않아 코(www. nose.co.kr)와 코성형(www.rhinoplastic.co.kr)의 도메인을 잡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환자의 절반 이상이 인터넷으로 그를 알고 찾아올 만큼 인터넷의 위력은 엄청났다. 국내최대의 의학전문 포털사이트를 만들어보자는 포부가 생겼다. “의료와 의사에 관계된 일은 뭐든지 한다”는 이 사이트엔 그래서 지난해 의료계 파업사태 때 의사들의 집회 동영상부터 요즘 들끓는 의료보험 재정파탄에 이르기까지 온갖 자료가 올라가 있다.
“지금의 보험재정 파탄문제는 의료수가 인상 때문이 아니라 환자수가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일부 의사들도 문제가 있겠지만 준비안된 의약분업을 밀어붙인 정부 탓이 크지요. 개인적으로는 환자에게 약을 어디서 구입할지에 대해 선택권을 주는 임의분업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의대 동급생으로 산부인과 의사다. 정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중이 제 머리 못깎는다고’ 결혼 7년만에 어렵게 아기를 가져 15개월된 딸을 두고 있다. 공원에서 의사, CEO가 된 지금 그는 행복한가. “과정을 즐긴다는 점에서는 지난 날이나 현재나 마찬가지예요. 누구의 행복이 더 크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죠. 희망이 없는 만족은…내 자식에게 주고싶지 않아요.”
▼정동학교수는…▼
▽1957년 서울출생
▽1975년 서울 성동공고 졸업
▽1976―84년 포항제철 근무
▽1979년 포항전문대 졸업
▽1984년 연세대 의대 입학
▽2000년 인하대 의학박사 취득
▽1996년―현재 인하대 교수
▽1999년 ¤엠디하우스 창업
▽1998년 홍콩, 99년 필리핀, 2000년 일본 교 토에서 열린 국제 학회에서 코재건술 발표
▽대한안면외상성형연구회 총무이사, 대한 비과학회이사.
▼정교수가 말하는 황사의 계절 코건강법▼
1. 외출했다 돌아오면 얼굴과 손을 깨끗이 씻는다. 흐르는 물로 코와 눈도 씻어준다.
2. 어린이와 노인 호흡기환자는 가급적 외출을 삼간다. 꼭 나가야할 때는 마스크를 쓴다.
3. 실내습도는 50%를 유지하도록 가습기를 활용한다.
4. 코를 후비거나 심하게 풀지 않는다.
5. 생리식염수로 하루 두세차례 콧속을 씻어주면 코막힘 예방에 효과적.
만난사람=김순덕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