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의 이날 상경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 면목동의 아들(38) 집에서 아들과 함께 잤다. 아들은 택시를 운전하며 월세 20만원짜리 지하 사글셋방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
아들은 ‘살인범’ 아버지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한때 주먹세계에 빠져 방황하기도 했지만 이제 아버지와 ‘화해’했다고 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억울함을 푸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정씨는 전했다.
정씨는그아들을 위해‘유서’를 미리 써가지고다닌다고했다.자신의 건강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아들에게 마지막 말이 전해져야하기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평생 짐만 지워주고 아무 것도 해준 것 없이 다시 부탁을 해서 미안하구나. 내가 죽으면 나를 묻지 말고 화장해 줬으면 좋겠다. 타고 남은 뼛가루는 강에 뿌리지 말아라. 누명을 벗지 못한 ‘살인범’의 더러운 흔적으로 강물을 오염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차라리 산에다 뿌려 거름이나 되게 해줬으면 좋겠다….”
정씨는 법원에 청구해놓은 재심이 받아들여져 ‘억울함’이 풀리면 유서를 고쳐 써야겠다며 웃었다. “뼈를 강에다 뿌려도 된다”고.
정씨는 또 얼마 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쓴 탄원서도 보여줬다. A4 용지 3장 분량의 그 글을 그는 나흘 밤을 새가며 타이핑했다고 말했다. 4월 두 번째로 발병한 중풍의 후유증으로 팔은 물론 손가락도 제대로 못 움직여 오른손 엄지손가락 하나로 타이핑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기자와 검찰청구내식당에서점심을 함께 했는데 숟가락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더 살아야 한다고, 더 살고 싶다고 했다. “아들에게 진실을 물려주고 죽어야겠다”는 것이다.
한편 아들은 20일 밤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아버지만 보면 눈물이난다”며“아버지의 누명을 벗겨드림으로써 30년 동안 한 번도 못한효도를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씨의 재심청구사건 재판부는 재심 개시여부를 놓고 계속 고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 사건에 대한 법률구조를 맡고 있는 서울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는 “조만간 재심개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심문이 진행될 것 같다”고 전했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