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부자가 될 욕망에 불타지 않더라도 자기사업을 한다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내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 명동의 패션쇼핑몰 밀리오레에서 1.2평짜리 옷가게 ‘이마상스’를 운영하는 김정선(金正善·39)씨는 공인회계사, 그것도 미국 회계사라는, 안정적이고도 명예로운 전문직을 박차고 지난해 의류사업에 뛰어든 사람이다. 》
그는 한국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86년 도미, 미국 롱아일랜드대에서 기숙사 야간경비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경영학석사(MBA)를 땄다. 피나는 노력 끝에 회계사 자격증도 땄다. 그리고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회계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한인상대였지만 ‘선생님’소리를 들으며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한국, 끈끈한 정이 오가는 한국이 그리워 미국에 자리잡을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써도 미국의 주류사회에 파고들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애시당초 깨달은 터였다. 결혼한 몸이라면 그냥저냥 주저앉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외로운 노총각이었다. 94년 귀국해 꽤 큰 규모의 회계사무소에서 일했고, 선배들과 컨설팅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국내에 진출하려는 외국기업을 돕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느꼈던 이방인이라는 감정이 한국에서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미국식 회계처리는 한국사정과 잘 맞지 않았다. 게다가 97년말 국제통화기금(IMF)사태가 터지자 일감이 뚝 떨어졌다.
“IMF가 아니더라도 늘 회의를 갖고 있었다. 어느 직업이나 그렇겠지만 회계사라는 일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의 돈이 오가는 일이니까. 약속한 날짜에 맞추기 위해 밤을 새는 것도 비일비재하다. 어차피 밤새워 일을 해야한다면 내 일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밤을 새더라도 자의로 잠을 못자는 것과 타의에 의해 어쩔수 없이 못자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어머니와 아내는 물론, 주변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했다. ‘사’자 붙은 전문직을 버리고 옷장사를 하겠다니. 그는 “내 사업을 키워 내가 회계사를 고용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식구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지난해 6월3일 1억5000만원을 들여 명동 한복판에 1.2평 짜리 자기사업을 시작했다.
회계사에서 옷장수로 변신한지 1년,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봤다. “얻은 것은 자유다. 내 뜻대로 내가 기획해서 내가 돈을 번다. 회계사 때는 그 반대였다. 남에게 매여있었고, 나와 일의 관계가 부조화(不調和)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물론 회계사는 안정적이고 사회적 명예도 얻을 수 있다. 옷장사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안다. 지금은 딸아이가 어리지만, 그 아이가 커서 옷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아빠를 자랑스러워 할지는 글쎄, 잘모르겠다.”
그러나 김씨는 일하며 얻는 기쁨의 차이는 정말 크다고 말했다.
“회계사 때는 프로젝트가 잘 끝나 상사의 칭찬을 받을 때, 고객의 인정을 받을 때 기분이 좋았다. 타인의 평가에 내 목을 맡기고 있었던 거다. 지금은 내가 나를 인정한다. 내가 만든 옷이 잘팔린 날, 돈다발을 들고 새벽바람을 맞으며 집에 갈때의 희열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돈을 얼마나 벌기에? “회계사때보다 낫다. 내가 뛴 만큼 내 몫으로 돌아오니까.”
첨단 테크놀러지가 춤추는 시대, 왜 비즈니스 중에서도 가장 수공업적인 옷장사를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기자를 딱하다는 듯 보더니 “나로서는 벤처기업을 창업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남들이 보지못한 틈새시장을 개척해 사업가의 아이디어와 능력으로 시너지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벤처라고 생각한다. 여러가지 아이템을 놓고 1년 이상 치밀하게 리서치를 했다. 동대문 남대문시장을 수도 없이 다녀봤다. 옷에서 나는 틈새시장을 봤다. 패션학원에서 머천다이징도 공부했다. 나의 열정과 회계사로서 쌓은 노하우를 접목한다면 애쓴 만큼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는 새벽 3시에 가게문을 닫는다. 퇴근 후 가는 곳은 집이 아니라 벤치마킹 장소인 동대문의류도매시장이다. 어떤 옷이 새로 나왔는지, 소재와 색상은 어떤지 흐름을 살피며 눈으로 사진을 찍는다. 이런데서는 종이에 뭘 끄적거리다간 당장 쫓겨난다. 두시간쯤 공부를 한 뒤 집에 들어가 그날 매출과 마진을 점검한다. 잠드는 시간은 오전6시에서 8시 사이. 그 시간에 디자이너는 벌써 원단상가로 출근해 새로나온 원단을 잡고, 그에 맞는 디자인을 정해 공장으로 옷을 발주했다. 그날 잡은 원단은 빠르면 그날 저녁 매장에 걸린다.
잠깐 눈을 붙인 뒤 김씨가 출근하는 시간은 오후 2시. 직접 손님을 맞지 않으면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다. 매장은 단순한 옷가게가 아니다. 자켓이, 9부바지가, 민소매 원피스가 싱싱한 생선처럼 펄펄 뛰는 수산시장이다. 상인은 시퍼런 눈을 번득이는 게릴라들이고, 소리없는 총성이 오가는 게릴라전을 펼친다. 잘팔리는 옷은 재빨리 더 만들도록 하고, 퇴짜맞은 품목은 눈물을 머금고 철수시켜야 한다.
“이처럼 다이내믹하게 움직이는 소매상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들었다. 우리옷이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다고 믿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겨울 홍콩에 갔더니 그곳 에이전트가 홍콩옷을 우리 쪽에, 우리옷을 홍콩에 풀어놓고 싶다고 하더라. 미국 뉴욕과 LA에도 우리옷을 팔 계획이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이 내 꿈이다. 파고들면 들수록 방대한 사업이 될 거라는 생각에 나는 밥을 안먹어도 배가 부르다.”
옷처럼 경기에 민감한 품목도 없다. 경제상황이 나쁘면 아래윗옷 세트로 된 정장이 안팔린다. 대신 이 옷, 저 옷에 받쳐입을 수 있는 단품이 잘 나간다. 봄에 김씨는 자켓 따로, 바지 따로 코디해서 입을 수 있는 정장풍 캐주얼을 내놓아 히트를 쳤다. 보통 하루 50장쯤 옷이 팔리고 주말이면 150장까지 올라간다. 그가 보기엔 지난달부터 사람들이 돈을 좀 쓰는 것 같다. 서민들의 돈주머니가 풀리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물론 매번 히트치는 건 아니다. 잘 안될 때도 있다.
“우리끼리는 옷장사를 ‘걸레장사’라고 한다. ‘신상’(그는 신상품을 신상이라고 했다)이 ‘꽝’되면 무게로 달아파는 땡처리를 해야한다. 방안구석에 걸레처럼 쌓인 재고를 보면 정말 가슴이 미어진다. 그 놈들도 내 새끼인데.”
그래도 옷은 정직하다고 믿는다. 주인이 부지런하고 성실하면, 여기에 경영마인드까지 있으면 적어도 ‘말아먹지는 않는다’. 성공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직은 아니다. 할 일도 많고…”하다가 그는 문득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어떤게 성공인지는, 글쎄 잘모르겠다. 사회적 지위나 명예로 따지면 회계사로 사는 것이 성공일거다. 어떤 사람에게는 미국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성공일 수도 있다. 요즘 교육이민 가려고 난리들이니까. 그런데 나는 그게 싫었다. 매일 반복되는 안정속에 묻혀살기엔 인생이 너무 재미없었다.”
부드러운 인상에 목소리도 크지 않았지만 그는 ‘남자로서’라는 말을 여러번 썼다. 미국서는 남자로서 어떤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다고 했다. 한번 사는 인생, 남자로서 모험도 하고, 또 깨지기도 하면서 치열하게 살고 싶었다.
“부자가 되고, 명예를 얻는 것이 성공인 것 같지는 않다. 미국서 회계사생활을 할 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돈과 명예가 따르지 않더라도 자기자신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기삶에 만족하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 그게 성공이라면 나는 지금 성공했다고 본다.”▼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1. 쌓아온 열매에 매달리지 말라〓회계사 공부를 할 때, 나는 내가 회계사라는 일도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공부와 직업은 달랐다.
2. 원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택하라〓나는 옷을 입는 것, 사는 것을 좋아했다. 장사 시작하기 전에도 명동에 나가 젊은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나는 명동에서 옷장사를 한다.
3.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말라〓남들이 좋게 보는 일, 하찮게 보는 시선에 좌우되지 말라. 남이 못보는 틈새를 내가 찾아내면 된다. 한번뿐인 내 인생, 내가 사는 것 아닌가.
4. 치밀하게 준비하라〓사업을 시작하기 전 1년 이상 리서치를 했다. 바닥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다. 나도 옷가게 점원부터 하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가방끈이 길어’ 주인들이 받아주지 않았다.
5. 희생없는 성공은 없다〓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내 경우 가족들과 ‘눈뜨고 있는 시간’이 맞지 않아 안타깝다. 희생을 감수할 각오가 됐다면 착수하는 거다.
<만난사람=김순덕차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