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묘청의 난'은 故土회복 운동

  • 입력 2001년 6월 8일 18시 45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각 나라에는 그들 고유의 신화(神話)가

있게 마련이다. 신화는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세뇌를 통하여 이제는 사실처럼 위장된 허구(虛構)’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로서 대표적인 허구적 신화가 아마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우리의 역사 인식일 것이다. 이러한 반도(半島)사관은 우리의 고대사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으로 매우 위험한 인식이다.이러한 허구가 우리에게 고정 관념으로 정착된 이유를 한 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문제를 따질 때 제일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름을 고려라고 지음으로써 마치 고구려의 법통을 이어받은 듯

위장했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좁은 남쪽의 삼한(三韓)에 안주하려 했던 왕건(王建)의 소심함이다.》

그가 북벌주의자였던 궁예와 의견 충돌을 일으킨 일차적 이유도 북벌에 대한 왕건의 반대 의견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고 싶어했던 궁예의 꿈과는 달리 왕건은 남방 세력인 삼한을 통일해야 한다고 늘 말했고, 고려를 건국한 후에도 남쪽 영토에 집착했다.

왕건의 이러한 삼한 위주의 건국 이념을 이어받은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신라를 정통으로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고구려를 비하했고, 중국에 항전했던 고구려의 기상을 묻어버리기 위해 삼국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을 지나치게 미화하기 시작했다.

▼신라 정통성 인정 고구려 비하▼

이러한 반도 사관에 대하여 가장 분노를 느꼈던 사람이 바로 고려 인종(仁宗) 때의 승려인 묘청(妙淸)이었다.

우리는 묘청은 요승(妖僧)이며 그가 일으켰던 반정(反正)을 ‘묘청의 난’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 있다. 이것은 ‘고려사’를 쓴 정인지(鄭麟趾)의 잘못도 있지만 그후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한 남방계 역사학자들과 일본 식민지사학자들의 그릇된 기록 때문이었다.

소위 임나(任那)일본부설에 입각하여 자신들이 신라의 남쪽을 식민지로 지배한 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사학자들은 신라가 삼국 중의 정통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논리적으로 한국을 지배한 적이 있다는 연고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라 중심으로 삼국시대사를 쓰려고 했다.

묘청이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다만 그가 태어난 곳은 서경(西京·평양)이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가 승려였다는 사실은 그가 풍수지리에 밝았음을 의미한다.

서기 624년 우리 나라에 도교가 들어온 이후 한국인들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사는 삶이 가장 아늑하다고 생각했고, 이때부터 불교에도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 깃들기 시작했다.

▼윤관의 북방정책에 영향받아▼

묘청이 윤관(尹瓘)의 아들인 윤언이(尹彦?)와 절친한 친구였다고 하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윤관은 그 당시 외교를 북방에 치중해야 한다고 믿었던 대륙론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묘청의 북방 정책의 뒷면에는 윤관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의 숭불정책(崇佛政策)과 더불어 묘청도 그 당시 사회에서 높은 인망(人望)을 얻고 있었다. 인종 시대에 이르면 묘청은 왕으로부터 대단한 신망을 받게 된다. 그는 왕을 알현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송도(松都)는 이미 왕기(王氣)가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찾는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모름지기 도읍을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도 묘청의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인종은 일년 중의 며칠은 평양의 서궁(西宮)에 머무르면서 북방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소 행차할 형편이 되지 못할 경우에는 몸이 가는 대신 자신의 옷을 보내어 왕의 기운을 서경에 심으려고 했다.

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자 묘청은 도읍을 서경으로 옮길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묘청의 이같은 생각은 송도의 유생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그들은 묘청이 서경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가 지방색 때문에 서경 천도를 주장한다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의 서경 천도론을 지방색으로 몰고 간 것은 묘청의 진심과는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그가 서경 출신이었기 때문에 서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서경 천도를 남달리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반대에 부딪히자 묘청은 순리대로 해서는 천도가 어려워지리라고 생각하고 자기 딴에는 묘책을 쓰기로 했다.

인종 10년, 왕이 서경에 행차를 하는 기회를 타서 묘청은 비밀리에 커다란 떡을 만들고 그 속에 기름을 넣어 대동강 물 속에 집어넣었다. 시간이 지나 떡의 기름이 물위로 떠올라 영롱한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묘청의 무리들은 왕에게 상소를 올려 중국의 천자(天子)처럼 고려의 왕도 제왕(帝王)이라는 칭호를 쓰고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자신의 연호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대동강에 서기(瑞氣)가 피어오르고 있으니 이제 곧 금(金)나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리 거스른 자충수에 궁지 몰려▼

그 동기가 아무리 훌륭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묘청이 진실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의 실수였다. 대동강에 피어오른 서기(瑞氣)라는 것은 곧 거짓임이 발각되었으며 이때부터 묘청의 계획은 의도했던 바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진실보다 더 큰 무기는 없다. 설령 자신의 뜻을 이루는 일에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묘청은 좀더 인내와 성실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묘청은 그렇지 못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망쳤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적으로 불행을 끼쳤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서경의 궁궐인 대화궐(大華闕)이 벼락을 맞아 민심이 흉흉해지고 이런 틈새를 타고 송도를 수도로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세력의 반격이 거세지자 인종도 마음이 흔들려 서경 천도를 멈칫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초조해진 묘청은 결국 인종 13년(1135)에 서경을 근거로 하여 정지상(鄭知常), 조광(趙匡), 유참(柳), 조창언(趙昌言) 등과 더불어 반역을 일으켰다.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고 부르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불렀다.

▼"조선역사 1천년 가장 큰 사건"▼

그러나 불행하게도 묘청은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이끄는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고전하던 중 부하 조광의 손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신채호(申采浩)가 이른바 ‘조선의 역사 1천년 이래 가장 큰 사건’이라고 평가했던 그의 고구려 정신도 함께 사그러지게 됐다.

미국의 정치학자 배링턴 무어의 말을 빌리면, 역사에서 실패한 자에 대한 연민을 갖지 않으면 그 시대의 신화에 파묻히고 만다고 한다.

이 시대에 묘청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우리가 결코 반도 민족도 아니었고 약소 민족도 아닌 대륙 민족으로서의 기백을 되찾을 수 있는 역사의 동력을 얻기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묘청은 결코 반역자가 아니었으며, 묘청의 난 또한 묘청의 ‘고토(故土) 회복 운동’이라고 바꿔 불러야 할 것이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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