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현주소]"내 마누라 내가 패는데…"에 수수방관

  • 입력 2001년 7월 3일 18시 39분


여성은 남성에 비해 폭력에 의한 피해자가 될 소지가 더 많다.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성폭력과 가정폭력으로 인한 여성 피해자는 늘어나는 추세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는 법들〓미군정 시대인 1946년 ‘부녀자의 매매 또는 그 매매계약의 금지에 관한 법령’이 제정된 이래 여성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는 법들도 발전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성폭력특별법과 가정폭력처벌특례법이다.

성폭력특별법은 성폭력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피해자 보호와 이를 위한 시설 설치 등을 규정하고 있다.

가정폭력처벌특례법은 가정폭력을 일으킨 사람에 대한 교화와 가정 복귀를 위한 보호처분을 명시했고 가정폭력피해자 보호법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피해자 보호와 이를 위한 시설 설치 등을 의무화했다.

▽“왜 도망가지 않았지요?”〓전국에 산재한 성폭력 관련 상담기관은 모두 72곳. 이들 상담기관에는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하은주(河銀珠) 상담관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장 먼저 겪는 문제는 경찰의 몰이해와 의료기관의 기피”라고 말했다.

▼ 글 싣는 순서▼
上. 남녀차별과 성희롱
中. 모성보호와 육아
下. 대(對) 여성 폭력
조사 과정에서 기억하기 싫은 상황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야 하는데다 경찰은 화간(和姦) 여부를 계속 따진 뒤 합의를 종용한다는 것.

하 상담관은 “며칠 전 상담한 20대 성폭력 피해 여성의 경우 갈비뼈가 부러져 3주 진단을 받고 경찰서에 갔으나 담당 경찰관은 합의를 종용하면서 ‘왜 도망을 가지 않았느냐’고 계속 질문해 다시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또 의료기관의 경우 아예 “경찰병원에 가라”며 진료를 기피하거나 진단서 작성을 피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김엘림 여성개발원 수석연구위원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서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수사관, 재판관에 의한 ‘2차 인권침해’가 생기기 쉬우며 피해자 보호시설 의료기관 등도 아직 미비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전국에는 8군데에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이 마련돼 있으나 시설당 정원 10명에 6개월(3개월 연장 가능)만 거주할 수 있도록 제한돼 운영 규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

오희옥(吳喜玉) 한국성폭력상담소 열림터 부장은 “친족관계 성폭행 등으로 피신처삼아 거주하는 청소년층이 많은데 이들은 거주기간이 지나면 다시 가해자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며 “보호시설을 늘리고 기간 제한 등도 현실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 마누라 내가 패는데”〓지난해 인천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담뱃불로 지지고 ‘전기고문’까지 하는 가정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남편은 정신감정을 받은 끝에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 사건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던 것은 남편이 아내를 묶어놓고 몇 시간에 걸쳐 ‘고문’하는 동안 이웃들이 비명소리를 들으면서도 모른 체했다는 것이다.

인천여성의 전화 배숙일(裵淑日) 부회장은 “‘남의 집 부부싸움에 관여하면 안된다’는 통념 때문인데 이는 가정폭력을 부추기는 잘못된 생각”이라며 “가정폭력은 사회범죄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서울시가 ‘서울여성의 전화’에 위탁 운영 중인 긴급전화인 ‘여성 1366’의 올 1∼5월 상담안내 실적에 따르면 총 6871건 중 30.4%(2088건)가 가정폭력 관련 상담이었다.

한국여성의 전화 이수정(李洙情) 인권센터 담당은 “상습적으로 매를 맞는 아내들의 경우 가장 먼저 부닥치는 문제는 ‘부부가 해결할 일’이라는 사회통념”이라며 “그래서 가정폭력에 대해서는 법보다도 인식 전환과 예방 차원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여성단체들이 97년 이후 5월이면 경찰청 등과 연계해 ‘가정폭력 없는 평화의 달’ 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이 때문. 나아가 여성단체 일각에서는 가정폭력처벌특례법을 수정해 가정폭력 사건을 알게 된 동사무소 사회복지사나 구급대원, 경찰 등이 신고를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로 규정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한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현실과 무관한 ‘윤락행위 등 방지법’〓김엘림 연구위원은 “윤락행위 등 방지법은 낙태문제와 함께 ‘법 따로, 현실 따로’의 표본”이라 말했다.

법은 성매매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성을 사고파는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 대상 연령은 낮아지고 있다. 이 법은 또 윤락여성의 사회복귀를 지원하는 시설 등을 약속하고 있지만 역시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변화순(卞化順) 한국여성개발원 연구부장은 “성을 파는 여성에 대한 처벌보다는 복지와 의식 전환을 통한 성매매 근절로 방향을 잡고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고 밝혔다.

<서영아기자>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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