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구 신림동〓승용차 위에 시루떡처럼 포개진 1t트럭. 상가를 덮친 12인승 승합차. 떠내려온 차에 부딪혀 방 한쪽 벽이 무너져 내린 집. 전기 합선으로 불이 나 시커먼 골조만 남은 가게들. 그리고 폭우가 몰고 온 토사와 산처럼 쌓인 쓰레기더미.
37년 만에 최악의 폭우가 지나간 15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6동 신신림시장에서 신림10동까지 1㎞ 남짓한 도림천 지류의 복개도로는 마치 폭격을 당한 시가를 재현해 놓은 영화 세트장 같았다. 이 마을의 한 주민은 “99년 경기 북부지방의 수해를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것 같다”고 했다.
길가 주차장에 세워진 200여대의 차량은 떠다니다 물이 빠지자 길 양쪽의 상가들을 덮치거나 차들끼리 포개져 흉하게 찌그러졌다.
거리의 처참한 모습만큼 인명 손실도 속출했다. 이 일대에서 이날 모두 10명이 숨졌다.시간당 약 100㎜의 폭우가 쏟아진 이날 오전 1시경부터 인근 삼성산의 계곡에서 내려온 토사와 쓰레기가 계곡과 복개도로가 맞닿는 지점의 하수토관을 막았다. 그러기를 3시간여. 복개도로 밑을 지나 도림천으로 흘러가야 할 빗물과 계곡물이 폭포수처럼 길 위로 넘쳤다.
넘친 물은 오전 4시경 신림10동 320 지하 셋방을 집어삼켜 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잠자던 김영자씨(40·여)와 두 딸, 그리고 김씨의 언니 오경자씨(44)가 집이 무너지면서 모두 숨졌다.
특히 김씨와 언니 오씨는 5월 한 방송국의 가족찾기 프로에서 헤어진 지 35년여 만에 극적으로 만난 터라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폭우와 계곡물은 성인 남성의 가슴 높이만큼 차며 신림6동쪽으로 흘러갔다. 특히 도림천마저 범람하는 바람에 물이 빠질 곳이 없어 이 일대의 피해는 더욱 컸다.
오전 4시경 신림6동 808 1층의 가건물 G호프집. 안에 있던 주인 오입분씨(62·여)와 종업원 김기자씨(45·여)가 대피하려는 순간 떠내려온 승용차 한 대가 가게 입구를 들이받았다. ‘펑’하는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고 순식간에 옆 B식당까지 옮겨 붙었다. 오씨와 김씨, 그리고 잠자던 B식당 주인 이태순씨(64·여) 등 모두 3명이 갑작스러운 불길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불에 타 숨졌다.
▽양천구〓이번 폭우로 양천구 일대 저지대 1000여 가구도 비 피해를 봤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은 신월 1, 2동 및 신정 2동, 목1동 등. 이 지역 주민들은 “해마다 장마철이면 상습적인 침수로 피해를 보는데도 공무원들은 근본적인 수해대책을 세워놓은 것이냐”고 반문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15일 오전 10시반경 양천구 목동교 부근 안양천변 주차장에는 40여대의 육중한 트럭이 마치 장난감처럼 엎어져 있다. 2.5t 냉동트럭 10여대가 바퀴를 하늘로 향한 채 누워있는가 하면 또 한 트럭은 앞바퀴를 다른 트럭에 얹은 채 아예 올라타 있었다.
수초로 뒤덮인 채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차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유안근씨(53·상업)는 “안양천이 범람한다는 비상연락을 받고 오전 2시경 급히 나왔지만 이미 물은 허리만큼 차버려 차를 빼낼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15일 오전 11시반경 목1동 409 일대 무허가 주택에 살고 있는 100여 가구 주민들은 그칠 줄 모르는 빗속에서 한 점의 집안 살림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이 지역은 바로 옆에 신정 제3펌프장이 있음에도 가장 큰 비 피해를 본 지역 중의 하나. 저지대인 데다 하수관마저 폭우를 이겨내기에는 턱없이 작아 하수가 흘러 넘쳤기 때문이다.
▽서초구 서초4동〓서초구 서초 4동 진흥아파트 주변일대도 3명이 감전으로 사망하는 등 침수피해가 컸다. 특히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의 70여점포 중 50여개가 침수된 이 아파트 상가 상인들은 간밤의 ‘악몽’을 다시 돌이키기 싫은 듯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물이 건물 지하부터 차 들어오기 시작한 시간은 15일 오전 2시경.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하음식점 주방에서 문닫는 정리를 하고 있던 장모씨(37)는 넘쳐 들어오는 물살로 인해 지하 음식점 전체가 잠기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완전히 잠겨버리더군요. 모래주머니로 상가 입구를 막아놓고 119에 수십번 전화를 걸었지만 불통이고…. 이제 한달 동안 장사는 다한 셈이죠.” 지하 식당입구에 떠다니는 식기와 야채 조각들을 주워담으며 장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지하실만 물에 잠긴 진흥아파트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작은 편이지만 주차해놓은 차들이 반 이상 물에 잠기는 바람에 밤새 한잠도 잘 수 없었다.
한편 이번 사태에 대해 상인들과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관내 행정당국이 뒤처리와 예방에 미온한 반응을 보인 결과라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영등포구〓저지대인 서울 영등포구 일대도 피해가 극심했다. 특히 대림 1∼3동, 신길 5동 등 주택가는 곳곳이 빗물에 잠겨 주민들이 밤잠을 설쳐야 했다.
영등포구 대림2동 일대는 골목마다 반지하 주택 주민들이 내놓은 이불 TV 등 가재도구로 가득했다. 지하 상가들도 침수돼 영업을 못한 곳이 많았다. 가까운 신길5동 역시 지하 및 반지하 268곳이 침수됐다. 1층 상가도 도로와의 사이에 턱이 낮은 곳엔 물이 들어찼다.
▽동작구 흑석동〓서울 동작구 흑석1동 달마사 근처에서는 산사태가 나 단층 슬래브집에서 잠자던 김동식씨(85)와 며느리 국길화씨(46) 등 2명이 숨지고 김씨의 부인 김삼종씨(80)와 아들 김유택씨(42) 등 2명은 다쳐 용산 중앙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옆방에서 잠자던 딸(20)은 다치지 않았다.
<이권효·정경준·현기득·김창원·박민혁·김정안기자>rati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