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한국말을 아예 할 줄 모르거나 서투른 외국인이 법정에 서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는 데도 재판에서 이들의 말을 제대로 통역해 줄 통역인이 충분히 확보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 때문에 법원이 재판 진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는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소수언어 사용 외국인 범죄 증가〓외국인 범죄의 최근 특징은 범죄자가 주한미군이나 일본인 등 인접 국가의 국민이 대부분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온 동남아시아와 아랍권 국가 사람들이 많다는 것.
실제로 10월 현재 서울지법에서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150여명의 외국인 가운데 상당수가 파키스탄이나 베트남 이란 등 제3세계 국민이며 서울고법에서 항소심이 진행중인 17건의 외국인 사건도 3건의 미국인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제3세계에서 온 외국인 사건이다.
▽부족한 통역인〓이들의 통역을 담당해줄 전문 통역인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현재 서울지법과 서울고법에 통역인을 알선해 주는 유일한 업체인 H사가 확보하고 있는 통역인은 수화전문 3명을 합해 모두 54명. 그러나 영어(15명)와 일어(5명) 등 선진국 언어를 제외한 베트남어와 아랍어 등 소수언어 통역인은 10여개 언어에 각 1명씩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전문 통역인이 아닌 경우가 많아 원활한 통역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
법원 관계자는 “실력 있는 통역인들은 비싼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통역비가 1회 10만원 정도인 법원의 통역을 맡기기가 어렵다”며 “결국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 있는 외국인 학생이나 아르바이트생이 통역을 맡게 된다”고 말했다.
통역인 부족으로 재판을 앞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로 기록된 공소장이 송달되는 것도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 미군의 경우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규정 등에 따라 영문 공소장이 전달되지만 그밖의 외국인은 번역도 되지 않은 공소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재판에서 효율적으로 공격과 방어를 하기 힘든 실정이다.
여기에 외국인 전담 재판부마다 개별적으로 통역인을 충원하고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인력 풀(POOL)이 가동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또 최근에는 서울 모 법원의 직원이 소액의 통역비마저 떼어먹고 통역인에게 1만원만 주려다가 덜미가 잡히기도 했다.
▽재판진행의 어려움 가중〓이런 사정 때문에 재판이 부실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서울지법의 한 판사는 최근 피의자가 방글라데시인인 범죄에 대해 국내 통역인을 구하지 못해 국내에서 수년간 체류한 방글라데시인 E씨(25)를 통역인으로 동원했다. E씨의 한국어 경력은 99년 입국, 지난해 국내 모 대학 한국어학당을 수료한 뒤 몇 차례 지방의 형사단독 재판에서 통역한 것이 전부.
이 판사는 “사정이 이렇다보니 통역인이 통역해야 할 한국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통역이 중간중간 끊어지고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도 확신하기 어려웠다”고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또 다른 판사는 통역이 너무 부실해 재판 중간에 통역인을 바꿔버린 사례도 있다.
외국인 전담 재판을 맡고 있는 한 판사는 “아직 통역이 잘못돼 재판 결과에 크게 영향을 준 적은 없지만 무죄 여부를 놓고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경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며 “외국인 범죄의 증가 추세에 따라 통역인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예산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