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마저 차갑게 느껴지는 21일. 전국 197개 자선냄비 가운데 ‘23호 자선냄비’인 ‘나’는 오전 10시 경기 과천시 구세군 사관학교를 나섰다.
오전 11시 내가 서울 중구 명동 한빛은행 앞에 도착하자 구세군 종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차가운 바람에 시민들의 볼이 내 몸처럼 빨갛게 달아오를 즈음 기다리던 ‘첫 천사’가 다가왔다. 은행에 다녀오던 24세의 여자 회사원.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1000원짜리 2장을 꺼내 황급히 내밀고 돌아섰다. 구조조정과 감원(減員)의 한파로 마음 졸이며 한 해를 보냈을 회사원인 그녀의 온정에 내 몸이 따뜻해졌다.
두 번째 천사는 택배회사 유니폼 차림의 20대 후반 남자. 살며시 다가와 동전 4개를 넣고 미소를 지었다. 인터넷 전자상거래의 활성화로 예년보다 2배 이상 늘어난 배달 물량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한해를 보냈겠지만 ‘훈훈한 인정’만은 잃지 않았다.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늘 수줍어한다. 대부분 그냥 지나칠 듯 걸어오다 행여 누가 볼세라 재빨리 돈을 밀어 넣고 황급히 돌아선다. 좋은 일은 남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겸손함’ 때문일 게다. 하지만 그 수줍음은 뿌듯함으로 바뀔 것이리라.
명동 거리는 오후 들어 기우는 해에 건물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시민들의 마음도 움츠러들었는지 나를 찾는 사람도 뜸해졌다.
잠시 외톨이가 된 내 앞에 장갑과 털모자, 목도리로 꼭꼭 둘러싼 꼬마가 나타났다.
“엄마, 여기 넣으면 돼?” “그래, 반으로 접어서….”
주부 김미진(金美眞·32)씨는 아들(5)에게 5000원을 쥐어주곤 흐뭇하게 웃는다.
올 한해 주부들의 마음 고생도 적지 않았다. 돈 쓸 곳은 많은데 남편의 월급은 줄고, 늘어만 가는 사교육비,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은행 금리…. 그래도 아이에게 ‘나눔’을 가르쳐주는 주부들의 마음은 따뜻함으로 가득하다.
오후 6시. 명동은 쇼핑객과 외국인 관광객, 연인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자기! 그냥 가는 거야? 돈 내고 가자.” “버는 것도 없는데….” 애인의 요구를 외면하려던 남자는 결국 1000원짜리 1장을 내게 건넸다.
요즘 젊은이들 호주머니 사정은 오죽하랴. 대통령까지 나서서 청년 실업률을 5% 이하로 낮추라고 독려할 정도가 아닌가. 이 남자도 청년 실업자인지 모르겠다.
오후 7시. 하루 일과를 마친 나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 구세군 대한본영으로 옮겨졌다. 이날 내게 들어온 온정은 108만여원.
성금을 정리하던 구세군 아저씨가 웃으면서 하는 말.
“정치인, 고위 공직자들의 수뢰 등 소시민들을 서글프게 만든 사건이 유난히 많았던 한 해지만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따뜻하군.”
17일까지 나의 자선냄비 동료들이 모은 성금은 10억100여만원. 지난해보다 2억원이 더 모였다. 이대로라면 자선냄비의 마지막 날인 24일까지 올해 목표액 17억원은 거뜬히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구세군 성금 ARS 060-700-0939
<최호원기자>besti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