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 2002/5]서민 울리는 군림행정

  • 입력 2002년 1월 6일 18시 17분


전남 목포시에 사는 이장헌(李長憲·61)씨는 최근 몇년새 공무원들의 무성의와 행정편의주의 때문에 속이 까맣게 타버렸다.

96년 국도 공사에 그의 논 1000여평이 편입될 때까지만 해도 땅값만 보상받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같은 공사에 편입된 다른 사람들은 평당 7000원 가량의 영농보상을 받는 게 아닌가.

‘보상’과 ‘미보상’의 차이는 담당 공무원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이씨의 땅이 들어간 부분을 공사할 때까지의 담당자는 영농실태조사를 하지 않았던 반면 그 뒤 바뀐 담당자는 영농보상비로 70필지에 모두 1억8000여만원을 지급했던 것.

▼글 싣는 순서▼

- ①공정한 정치 누가 막나
- ②여야의 주문과 다짐
- ③경제 바로세우려면
- ④불공정 사회풍토
- ⑤서민 울리는 군림행정
- ⑥선진국 게임의 법칙

그는 98년경부터 같은 처지의 이웃 22명과 함께 집단 민원을 제기했으나 목포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난해 7월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현지 조사 등을 거쳐 목포시에 시정권고를 하기에 이르렀지만 목포시는 이 또한 수용하지 않고 있다. 공사 당시의 작물재배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2년간 수십번 시청을 찾았다는 이씨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포기할까 하는 중”이라며 한숨을 쉰다.

우리 헌법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官)’이 ‘민(民)’ 위에 군림하고 관의 편의대로 행정을 꾸려 가는 현상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관이 민의 공복임을 감안할 때 이는 중대한 불공정행위인 것이다.

‘행정편의주의’와 ‘보신주의’, ‘철밥그릇 챙기기’ 등의 말로 표현되는 관의 행태는 우리사회에서 관과 민 사이에서 형성되어 있는 대표적인 언페어한 행위이며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다.

▽서민 울리는 행정편의주의〓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회사원 임춘희(林春喜·29)씨는 자신의 ‘거주자우선주차지’에 주차한 첫날 차를 견인당했다. 스티커를 붙이지 않았다는 이유. 그는 “차 번호와 주차지 번호를 대조해 보는 정도의 서비스 기반도 갖추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지만 구청 서울시 청와대 등에 억울함을 호소할 때마다 관할이 아니라며 ‘핑퐁’을 하는 공무원의 태도에 지쳐버렸다”며 “말은 국민의 공복이라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림하는 것 아니냐”고 개탄했다.

행정기관에 대한 옴부즈맨 역할을 하는 고충처리위원회에는 지난해 1만7220건의 민원이 접수됐다. 행정기관들이 잘못해 놓고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례뿐만 아니라 책임 떠넘기기로 인해 이곳저곳 헤매던 민원들이 모여드는 것.

송창석(宋昌錫) 국민고충처리위 전문위원은 “다수의 공무원들이 선례만을 답습하거나 법과 규정을 경직되게 적용하는 등 보신주의로 일관, 민원인들을 고달프게 한다”고 말한다.

▽관(官)에 줄대기〓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김모사장(40). 그는 경제부처 4급 공무원인 고등학교 동창생이 ‘콜’하면 언제라도 달려간다. 용건은 늘 술자리 스폰서다. 규제와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끝발 있는’ 부처에서 일하는 친구인지라 ‘보험’드는 셈치고 ‘사역’을 다한다. 한번 불려 가면 수백만원이 깨지지만 때가 되면 ‘본전’을 찾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

지난해 12월 한국행정연구원이 중·대기업체 관계자와 자영업자 50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공직사회 부패 실태’에 따르면 응답자의 62.4%가 민원을 할 때 일상적으로 금품 및 접대 제공이 이뤄진다고 답했다.

시민생활과 밀접한 14개 행정 분야 가운데 부정부패가 상대적으로 심각한 곳으로는 ‘건설건축, 세무, 경찰, 법조분야’가, 행정 단위 가운데 부정부패가 가장 만연한 곳으로 ‘중앙행정기관의 본청’이 꼽혔다. 특히 각종 ‘게이트’와 관련돼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법조계는 응답자들이 본 부패만연도 부문에서 1위를 기록했다.

행정연구원 박중훈(朴重勳) 정책평가센터 소장은 “부패가 줄고 있다지만 부패의 겉모습이바뀌었을 뿐”이라며 “관에 줄을 대려는 민과 이를 이용하는 관 등 민관부문에서 우리 사회의 페어플레이를 가로막는 현상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고 지적했다.

▽철밥그릇 챙기기〓‘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새 정부 들어 4년간 힘없는 지방공무원, 하위직은 얼마간 줄었지만 각종 위원회 신설로 장·차관급은 14%나 늘었다. ‘구조조정〓영원한 퇴출’이 대부분인 민간기업 퇴출자들은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현 정권 들어 대통령 직속 정부위원회가 6개 늘어났고, 장관급 행정위원회도 올 1월까지 6개로 늘어난다”며 “이 때문에 ‘옥상옥’ 현상도 빚어지고 유관 부처와 갈등도 있다”고 귀띔한다.

공무원 인건비 총액도 98, 99년을 거치며 14조4000억원으로 다소 줄었다가 2000년부터 늘어 올해엔 20조8000억원으로 급증할 전망. 여기 더해 행정자치부는 2002년 새로 3만6400여명을 뽑을 계획이다. 올해 2만5400여명보다 무려 43.4%를 늘어난 수치다. 이에 대해 “정부가 ‘청소년 실업 해소’라는 명분에 기대 또다시 ‘밥 그릇 챙기기’에 나섰다”는 비난이 제기되고 있다. 공직에서 산하기관으로 내려가는 낙하산인사나 퇴직공무원이 개방형임용직을 많이 차지하는 것 등도 언페어한 사례다.

운동경기에서 페어플레이를 하려면 선수 각각이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공성진(孔星鎭) 한양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결국 관과 민의 올바른 관계는 ‘제자리 찾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민은 참여를 통한 주인 의식을, 관은 공복으로서 민을 받드는 자세로의 복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영아기자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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