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명예회장은 “권력의 힘은 물리적 수단이지만 언론의 힘은 말(言)의 힘이며 이것은 곧 독자의 공감(共感)인데 권력은 이런 독자들의 공감을 이른바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지적했다.
김 전 명예회장은 이날 오후 2시 서울지법 형사합의 21부(박용규·朴龍奎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공판에서 최후진술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김 전 명예회장은 “언론사라고 해서 세무조사의 성역일 수 없으며 지적된 잘못을 겸허히 반성한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언론을 길들여 무력화하고 도구화하려는 불순한 동기에서 기획, 추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 명예회장은 이어 “이 정권은 장기간에 걸쳐 전례 없는 대규모 세무조사를 실시한 뒤 감당할 수 없는 추징금을 부과했다”며 “더욱이 언론계 관행의 영역을 자의적으로 축소하고, 그 경우 드러날 수밖에 없는 흠결까지 과장하고 악의적으로 발표해 해당 언론사와 대주주를 부도덕하게 몰았다”고 말했다.
김 전 명예회장은 이어 “지난해 권력 주도로 추진된 이른바 ‘언론개혁’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고 어떤 성과를 가져왔는지를 생각하면 안타깝다”며 “이는 불신(不信)과 반목(反目), 분열(分裂)을 확대해 오히려 갈등을 치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김 전 명예회장은 또 “동아일보는 앞으로도 권력의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정확, 공정한 보도와 논평을 통해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다하리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서울지검 특수3부(차동민·車東旻 부장검사)는 이날 김 전 명예회장에 대해 징역 7년 및 벌금 80억원, 김병건(金炳健) 전 부사장에 대해 징역 6년 및 벌금 100억원을 구형했다. 동아일보 법인에 대해서는 벌금 10억원이 구형됐다.
선고공판은 2월4일 오후 2시에 열릴 예정이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김병관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최후진술
실정법 위반 여부를 다투는 엄정한 법정에서 저의 허물을 변명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세무조사 과정에서 언론사 관행과 회계처리 부주의로 빚어진 잘못된 점들을 지적 받았으며 그 점 겸허하게 반성합니다. 동아일보 발행인으로, 또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빚어진 이 같은 잘못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언론사라고 해서 세무조사의 성역일 수는 없습니다. 위반사실이 있으면 응분의 책임을 지고 처벌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책임감에서 저는 지난해 세무조사가 끝난 시점에 스스로 명예회장직과 이사직에서 사퇴했습니다. 동아일보도 이 일을 계기로 잘못된 관행을 시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언론을 길들여 무력화하고 장악해 도구화하려는 불순한 동기에서 기획되고 추진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동아일보는 민족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훼손되거나 국가안보가 위태로워지는 일, 그리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과제가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일에 대해서는 경계해 왔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동아일보는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현 정권의 대북정책 수행이 드러낸 지나친 양보나 무리한 발상 등 많은 문제점을 적시에 비판해 왔습니다. 권력은 이 비판이 남북관계를 이용해 국내 정치적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려는 자신들의 정략적 구도에 차질을 가져오게 되리라고 우려한 것입니다. 게다가 내치(內治)의 거듭된 실정(失政)과 권력부패에 대해서도 엄정히 비판하자 정권재창출에 끼칠 영향을 우려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정권은 장기간에 걸쳐 전례 없는 대규모의 조사인력을 투입해 무차별적인 방법으로 세무조사를 실시하여 감당할 수 없는 추징금을 부과했습니다. 더욱이 언론계 관행의 영역을 자의적으로 축소하고, 그렇게 하면 드러날 수밖에 없는 흠결까지도 과장하고 악의적으로 발표해 해당 언론사와 대주주를 부도덕하게 몰았습니다.
결국 이번 세무조사는 조세정의 구현이라는 미명으로 자행되고 적법한 권력행사로 포장된 언론탄압입니다. 권력의 힘은 물리적 수단이지만 언론의 힘은 말(言)의 힘이며 이것은 곧 독자의 공감(共感)입니다. 지난해 권력은 바로 독자들의 공감을 이른바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지난해 권력 주도로 집요하게 추진된 이른바 ‘언론개혁’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고 어떤 성과를 가져왔는지를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 각계에 불신(不信)과 반목(反目)과 분열(分裂)을 확대해 오히려 갈등의 치유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일부 신문과 방송은 이를 확산시켜 사회통합 기능을 담당하는 언론 본연의 역할마저 저해했습니다.
언론과 권력은 기본적으로 긴장 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며 그 같은 언론을 통제하고 싶은 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한국의 ‘정도(正道) 언론’은 작년의 혹독한 시련을 거울삼아 거듭 태어나리라고 봅니다. 그것은 권력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론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언론은 생존도 발전도 할 수 없습니다.
동아일보는 82년의 역사에서 보여주었듯이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맞서면서 불편부당 시시비비의 자세를 일관되게 지켜왔습니다. 앞으로도 권력의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와 논평을 통해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다하리라고 믿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적(私的)인 일을 법정에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저의 참담한 심정을 너그럽게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권력도, 정치도, 경영도 몰랐던 집사람은 지난해 권력이 빚은 소용돌이를 견디지 못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가문의 종부(宗婦)로서 명예와 책임을 무엇보다 중히 여기며 살았던 내자는 주변에 가해지는 권력의 압박에 심리적 불안을 겪어야 했고 지난해 7월 초순에는, 한밤중에 협박전화까지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빌어라. 그렇지 않으면 동아일보도, 회장도 다 죽는다”고 말입니다.
결국 내자는 핍박받는 동아일보와 남편을 대신해 스스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제가 안사람을 떠나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러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내자 안경희(安慶姬)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2002년 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