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년간 수차례 미국의 학교와 가정을 취재하며 기자가 내린 결론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가정의 ‘밥상머리 교육’이 여전히 유효하며 세상을 향해 교실문을 열어두는 ‘실사구시’의 학풍이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미국 중산층 이상은 만족스런 학업성적표만 들이밀면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버르장머리 없는’ 응석받이를 기르지 않는다. 우리가 국어와 수학 문맹 퇴치에 매달리는 동안 이들은 ‘기업가적인 읽고 쓰기(Entrepreneurial Literacy)’와 ‘정치적 읽고 쓰기(Political Literacy)’에 주력한다. 공부만 잘하는 책상물림이 아니라 미국사회를 이끌어갈 책임있는 리더, 능동적인 시민이 갖춰야 할 자질이 무엇인지를 실제생활과 연계된 교육으로 몸에 익히는 것.
‘미래의 벤처 기업가를 구함. 창조적인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에게 연락바람’ ‘중국과 무역하는 회사를 차리기 위해 사원을 모집함. 금요일 오후 비즈니스 클럽’.
새학기가 시작되면 미국의 고교 게시판에는 동아리 회원 모집 광고와 함께 어린 창업자들이 내건 ‘구인 광고’가 등장한다. 정규 수업시간에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돈벌이가 될만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해 사고 파는 실습을 한다.
미국 뉴저지주 테너플라이 고교에서는 학생들이 문구점을 직접 운영한다. 도매점에서 물건을 떼다가 이익을 남기지 않고 팔면 전교생이 싼 값에 학용품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시간에 배운 요리 기술로 학교 카페테리아를 운영하며 식당 경영 체험을 쌓는 학생들도 있다.
‘주니어 어치브먼트(Junior Achievement)’ ‘영 엔터프라이즈(Young Enterprise)’ ‘기업가정신교육전국재단(The National Foundation for Teaching Entrepreneurship)’ 등은 정규 수업이나 특별활동 프로그램을 통해 경영 학습을 도와주는 국제 단체들이다.
유치원 단계에는 동네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법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소비자의 권리와 의무를 배우고 직접 회사를 차려 사업을 하고 세금도 내면서 경제가 일상생활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를 체험한다. 10대 대상 비즈니스 컨테스트가 열리기도 한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는 어려서부터 진로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도시로 유명하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 돈을 쓰는 것과 저축하는 것의 차이를 안다. 2학년은 직업에 관한 책을 읽고 3학년 때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옷차림이 좋은지 배운다. 6학년이 되면 취업용 모의 면접과 서류 작성을 해본다….’ 신시내티 교육청이 설정한 초등학교 진로교육의 목표다.
고교생이 되면 ‘커리어 패스포트(Career Passport)’를 하나씩 만들어야 한다. ‘기업 회계분야에서 석사학위 받기’등 학생 개인의 진로 목표와 고교시절의 활동 사항, 수상 실적, 상장 사본, 학업성적, 졸업장 등을 담고있는 A4용지 크기의 서류철이다. 지역 기업 중에는 사원 채용시 이를 전형 자료로 활용하는 기업이 있을 정도로 커리어 패스포트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
미국 동부지역에서는 ‘실용 정치학’ 과목 수업의 일환으로 각 당의 선거본부에서 선거운동을 돕는 고교생을 만날 수 있었다. 학생들은 기부금 모집을 제외하고는 전화받기 편지보내기 등 모든 자원봉사 활동을 할 수 있다. 때로는 국회의원이나 주지사를 수업시간에 불러 “주지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월급은 어디서, 얼마나 받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학생들 스스로 모의 선거를 치르며 공약을 개발하고 선거 팜플렛을 만들며 선거후 패인 분석까지 하는 것도 주요 학습 내용이다.
정치의 핵심은 설득. 뉴욕시 뉴타운 고교에서는 학내 서클 중 우등생이 몰려드는 ‘링컨 더글러스 토론클럽’이 유명하다. 링컨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 상대 후보가 더글러스였다. 또래간의 화제부터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국의 인권문제까지 토론하는 동아리다. 여기서 단련된 학생들은 매년 뉴욕시 주최 토론대회에 나간다. 뉴저지주 테너플라이 고교 토론클럽에서 만난 고교생이 말하는 토론의 묘미.
“남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설명해야 이길 수 있다. 결국은 내 의견을 관철시키는 과정에 매력을 느낀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