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9일 발매될 ‘신동아’ 2002년 2월호와의 독점 인터뷰에서 장씨는 “윤태식을 서울로 데리고 온 날(1987년 1월9일) 바로 조사에 착수한 대공수사국은 윤태식으로부터 수지김을 살해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고 밝혔다.
그 하루 전인 1월8일 안기부는 태국 방콕에서 윤태식씨의 기자회견을 주선했다. 이 회견에서 윤씨는 “내 처(수지김)는 북한 공작원이었고, 북한은 처를 이용해 나를 북한으로 납치하려고 했다. 이러한 북한 공작 조직에 속아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으로 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해 왔다” 고 주장했었다. 1월9일 서울에 도착한 윤씨는 김포공항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왜 반공이 중요한지 알게 됐다” 고 말하기도 했다.
이 회견을 하고 안기부로 간 윤씨는 “수지김은 북한 공작원이 아니고 내가 수지김과 같이 살던 홍콩 집에서 수지김을 죽여놓고 왔다” 고 자백했다. 대공수사국으로부터 이런 보고를 받은 장씨는 “적당한 시기를 택해 윤씨를 검찰로 송치하려고 했었다” 고 말했다.
그러나 장씨는 1월14일 터져나온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 사건, 1월20일 김만철(金滿鐵)씨 일가 귀순사건, 4·13 호헌조치와 13대 대통령 선거 준비, 그리고 윤태식을 검찰에 송치했을 때 예상되는 북한의 역선전 공세 등 때문에 윤의 송치를 미루었다. 그러다 윤을 검찰에 송치하지 못한 상태에서 5월26일 내각 총사퇴가 결정됨에 따라 안기부장을 사임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이와 관련, “재임 중에 일어난 일을 깨끗이 마무리 짓지 못한 데 대해 수지김의 유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 고 말했다.
장씨는 지난해 12월11일 검찰에 소환돼 조사 받을 때, “검찰이 보여준 자료 중에는 자신이 직접 싱가포르에서 윤태식의 기자회견을 열라고 지시한 내용이 들어 있는 전문(電文)이 있어 큰 충격을 받았다” 고 밝혔다. 장씨의 이런 발언은 안기부 간부 중에서 누군가가 장씨에게 알리지 않고 장씨의 이름을 빌어 윤태식씨 기자회견을 강행시켰다는 주장이다. 즉 안기부의 핵심간부 중의 한 사람이 안기부장을 속였다는 것이다.
검찰수사 자료와 장씨의 증언 등을 종합해 당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1987년 1월4일 홍콩을 떠나 싱가포르에 도착한 윤태식씨는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자진 월북을 상의했으나 북한대사관 측은 윤씨를 ‘이상한 사람’ 으로 취급해 쫓아냈다. 다음날 갈 데가 없어진 윤씨는 미국대사관을 찾아가 횡설수설하자 미국대사관도 똑같이 생각해 한국대사관에 알려 데려가게 했다. 윤씨를 데려온 한국대사관에서는 이장춘 대사 이하 외무부 영사들과 남영식씨를 비롯한 안기부 요원들이 윤씨를 신문했다.
조사결과를 토대로 외무부와 안기부는 각각 서울의 본부에 사실 보고를 했다. 1월6일까지도 싱가포르에 있던 외무부와 안기부 직원들은 윤씨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1월7일 안기부 서울 본부는 윤씨의 주장을 심도 있게 살펴보기 위해 해외공작국의 장승옥 부국장을 보냈다.
이날 싱가포르에 도착한 장부국장은 윤씨를 조사한 후 저녁 9시쯤 ‘윤태식의 기자회견을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 는 전문을 서울로 보냈고, 안기부 본부는 이를 승인했다. 그런데 그날 자정을 넘긴 1월8일 새벽 0시50분쯤 서울 안기부에서는 싱가포르에서 윤태식 기자회견을 가지라는 내용의 전문이 여러 통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발송됐다. 이 전문에는 ‘부장의 지시다’ ‘국가 정책판단이다’ 는 문구를 달고 현지에서 윤태식 기자회견을 강행하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장세동씨는 “상황이 바뀐 게 없는데 왜 한밤중에 기자회견을 하라는 전문이 갔느냐?” “서울지검 조사를 받으며 나는 이 전문을 처음 보았다.”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나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고 말했다. 이어 장씨는 도둑이 들었을 때 똥개는 겁이 나서 주인을 깨우기 위해 왕왕 짖는다. 그러나 세퍼트는 힘이 있으므로 조용히 기다렸다가 도둑에게 덤벼든다. 왜 부장을 팔아 현지에서 윤태식 기자회견을 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을 찾아간 윤씨 사건 조사를 총지휘한 사람은 해외공작국장 정모씨(65)다. 정씨는 한때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형근(鄭亨根)씨로 잘못 알려졌던 인물. 그러나 정씨는 서울지검 조사에서 “나는 이 전문을 보낸 기억이 없다” 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씨가 서울에 와서 살인사실을 자백한 후 대공수사국과 해외공작국 사이에는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미묘한 긴장이 흘렀다고 한다. 이러한 책임 전가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윤씨를 검찰로 송치하자는 주장을 하지 못해 15년동안 윤씨는 자유롭게 활보하다 마침내 대통령까지 만나는 벤처사업가가 된 것이다.
장세동씨는 “윤태식을 방치함으로써 수지김 유가족에게 상처를 준 것은 정말 미안하다” 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이정훈 신동아기자 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