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스러운 귀화 조건〓96년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한 후 직장을 이탈해 불법체류 상태에서 98년 한국 여성과 결혼한 필리핀 출신 엔리코 요물(35)은 불법체류 전력 때문에 단기 방문동거자격(F1) 비자밖에 받을 수 없어 매년 몇 번씩 필리핀을 다녀와야 했다.
3개월∼1년짜리 F1 비자로는 귀화할 때까지 직업도 가질 수 없다. 또 일정 기간마다 체류 연장 허가를 받아야 하며 받지 못하면 자국으로 돌아가 다시 비자를 받아 입국해야 한다.
귀화 조건으로 3000만원 이상의 재산을 요구하는 것도 큰 부담이다. 97년 한국 여성과 결혼한 파키스탄인 M(34)은 재산 조건을 갖추기 위해 경기도의 한 가구공장에 불법 취업했다. 그는 “아내가 식당일을 하면서 벌어오는 월 100여만원의 수입으로는 세 식구 생활비에도 모자라 불법 취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려운 귀화시험〓현행법에 따르면 귀화 희망자는 결혼 후 2년 이상 한국에 거주해야 귀화시험 지원 자격이 주어진다. 하지만 20문제 중 12문제 이상 정답을 맞혀야 합격하기 때문에 동남아 출신 외국인은 물론 중국 조선족도 합격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지난해 12월 귀화시험에 불합격한 조선족 이모씨(32·여)는 “한국에서 사는 데 필요한 기본 소양을 묻는 문제라고 보기에는 부적절한 문제들이 많았다”고 불평했다.
지난해 귀화시험(혼인귀화) 합격자는 660여명으로 매년 지원자의 50∼60%만 합격해 귀화를 원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귀화고시’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정부 입장 및 전문가 대책〓귀화 절차를 복잡하게 하고 시험을 어렵게 한 것은 위장결혼을 통한 외국인의 국내 불법체류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최근 국내 체류를 목적으로 한 외국인의 위장결혼이 늘고 있어 절차를 완화하면 사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동대 박경신(朴景信·법학) 교수는 “일본의 경우 불법체류 외국인이라도 일본인과 결혼하면 귀화하지 않고도 취업이 가능하고 미국도 최근 귀화시험을 없앴다”며 “결혼 문제에 관한 한 인권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최진영(崔眞榮) 사무국장은 “우리의 귀화제도는 아이까지 낳아 신분이 확실한 외국인에게도 가혹한 측면이 있다”며 “귀화 절차 자체는 까다롭게 하더라도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취업비자는 내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외국인 인권침해 연수생제도 폐지" 40개단체 대책委 촉구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등 40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외국인노동자 차별 철폐와 기본권 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산업연수생 제도의 폐지를 촉구했다.
참석자들은 기자회견에서 “산업연수생 제도가 저임금 단순노동을 공급하는 편법으로 이용되고 있다”며 “연수생 대부분이 과도한 송출비용, 강제노동, 작업장 폭력 등 인권침해를 당하게 하는 산업연수생제를 폐지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대부분 3D 업종의 생산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95%가 불법체류자이거나 편법노동자”라며 “정부가 연수생 제도로는 필요한 외국인 노동력을 충당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적절한 대책 없이 방치해 20만명이 넘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를 양산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들은 “정부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를 사면하고 이들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를 개선하기 위해 올바른 고용허가제와 노동허가제를 실시하라”고 촉구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