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시 합격자를 위한 사법대학원(지금의 사법연수원)을 두었던 서울대 법대는 81년 이전까지 합격자의 60∼70%를 배출하는 ‘독과점’의 지위를 누렸다. 67년 7회에는 합격자의 100%가 서울대 법대 출신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합격자 중 서울대 법대
출신은 21.5%. 이 비중은 머지않아 10%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미국식 법과전문대학원 제도의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이는 장차 이곳 출신이 아닌 법조인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 법조계 산실로서의 ‘서울대 법대’라는 단과 대학의 위상변화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사시 과외와 조기수험 열풍
서울 명문고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최상위 성적으로 입학했던 A씨(27)는 최근 사법시험 준비를 영원히 접고 군 입대를 결심했다. 제대 후 법학 공부를 위해 유학에 나서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 그간 힘들었던 것은 객관식인 1차 시험이었다. “대학에서는 좀 더 깊게 따져 보며 공부하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가족은 A씨를 이해하는 분위기지만 주위에서는 다르다. “1000명이나 뽑는데 너 같은 수재가 왜?”라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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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2학년생인 B씨(21). 지난해부터 매주 한차례 서울 신림동의 한 하숙방에서 사시 과목 과외를 받고 있다. 사시 준비 10여년째인 법대 선배가 그를 답안 강평식으로 가르친다. 주당 1회에 수업료는 월 30만원. 물론 이 같은 과외는 서울대 법대생들만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노장 수험생, 학원 강사들로부터 개인·그룹과외 등을 받는 사시 수험생이 적지 않다. 200만원까지 받는 강사도 있다.
‘조기 수험 준비’도 열풍 수준이다. 입학 전에 헌법이나 민법총칙 교재를 읽고 들어오는 신입생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한 서울대 법대 졸업생은 “수시모집에 합격한 고 3생들이 사시 준비에 뛰어든다는 타 대학 상황에 비춰보면 후배들이 특별히 극성스럽다고 얘기할 현실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장기 수험 전쟁, 실탄은 돈
합격자 1000명 시대가 다가왔지만 수험준비기간은 더 늘어난 것으로 나타난다. 지난해 사법시험 합격자 평균연령은 30세를 넘어섰다. 이런 현상에서 서울대 법대도 예외는 아니다.
사시 최종합격자가 300명이던 80년대 중반 서울대 법대의 재학생 합격자는 40명 선이었다. 그러나 합격자 991명을 뽑았던 지난해 역시 재학생 합격자는 46명. 이 기간에 신입생 정원은 60명가량 줄었을 뿐이다.
장기 수험생들은 과거보다 공부해야 할 양이 확실히 늘었다고 말한다. 형법의 경우 10여년 전에는 작은 판형의 교과서 총론, 각론 각각 500쪽과 문제집 500쪽이면 됐다. 그러나 지금은 확대된 판형의 교과서 총론, 각론 각각 1000쪽과 문제집 1000쪽 독파가 필수다.
과거와 달리 매년 급증하는 판례가 시험에 크게 반영되는 데다, 우리 법학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고, 매년 교과서 증보판이 나오는 등 공부 분량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법연수원생(36)은 “1차 문제부터 다르다. 요즘은 문제 지문이 길어져 시간 내에 읽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고시과목이 비슷했던 과거에는 1학년 말부터 시험을 준비해 사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에 재학중 합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3과 패스’는 사실상 ‘전설’이 됐다. 요령 있게 최소 3년반가량 사시에만 전력투구해야 합격을 바라볼 수 있다고 수험생들은 말한다.
수험 준비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서울대 법대에는 군 입대를 늦추기 위해 휴학하는 이른바 ‘5학년생’이 늘고 있다. 타 대학의 법학과 대학원으로 진학하거나 아예 과까지 바꿔 진학하는 졸업생도 많다. 2001년 2월과 2000년 8월 졸업자 259명 가운데 이 같은 학생은 38명. 1년 전 같은 기간 졸업자의 경우 21명으로 2배가량 늘었다. 다른 대학의 대학원에서는 사시 준비자의 만성적인 결석을 눈감아 준다.
수험 장기화에 반드시 따르는 것이 ‘수험준비 자금’ 문제다. 이 점에서 최근 서울대 법대 출신들은 유리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서울대 학생생활연구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법대 입학생 중 가정환경을 ‘상류’ 혹은 ‘중상류’라고 답한 학생은 전체의 24.7%. 16개 단과대 중 음대, 의대에 이어 세 번째다. 아버지가 전문직이거나 행정부처의 고위 공무원, 기업의 관리자급이라고 답한 학생은 61.5%로 단과대 중 네 번째다. 90년 법대 신입생의 경우 아버지가 이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학생이 24.3%였음에 비춰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지난해 서울대 법대 입학생 중 서울 및 광역시 출신은 80.9%였다.
한편 지난해 법대 신입생의 0.9%만이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것을 돈이라고 답했으며, 단과대 중 가장 낮은 비율이었다.
그러나 7년째 사시 공부중인 이곳 출신자(30)는 “한달 생활비로 90만원가량 든다”며 “공부보다 수험자금 조달이 더 고달프다”고 말했다.
●대폭 줄어든 행정부처-외교관 진출
서울대 법대 96년 입학생인 이모씨(25)는 “우리가 입학하기 전까지는 재학생의 60%가량이 사시 수험생이라고 들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95% 이상이 사시 수험생”이라고 단정했다. ‘사시 쇄도 현상’이 일고 있는 것. 그러나 향후 이곳 출신자의 법조계 내 비율은 크게 줄 전망이다. 88년 판사 신규 임용자 72명 가운데 52명이 서울대 법대 출신이었으나 지난해는 임용자 159명 중 53명이었다. 검사의 경우 88년에는 신규 임용자 43명중 20명이었으나 지난해는 123명 중 27명으로 크게 줄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변호사 C씨(35)는 “의대 상경대 공대 예술대 출신의 법조인들이 과거에 비해 크게 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며 “앞으로 이들의 관심사가 법원 검찰의 인사 등에 반영됨에 따라 달라지는 점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성균관대 등 법대 파워가 강한 명문 사립대 출신 법조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들의 ‘휴먼 네트워크’가 커지고 관심사도 다양해질 전망이다.
한편 서울대 법대 출신자의 행시 외시를 통한 행정부처, 외교계 진출은 크게 줄었다. 현재 외교부의 경우 2급 국장급 이상 간부 202명(산하기관 제외) 중 39명(약 19.3%)이 서울대 법대 출신이지만 98∼2001년 외시로 임용된 112명 중 서울대 법대 출신은 5명(약 4.5%)에 불과하다. 여기에 임용됐다가 사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서울대 법대 86, 87년 입학자로 외교통상부에 들어갔던 6명 가운데 5명이 사직했다.
일반 행정부 쪽도 비슷한 양상이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매년 10명 안팎이 진출, 60, 70년대의 왕성한 진출에 비하면 큰 폭으로 줄었지만 명맥은 잇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실상 행시 지망자가 없어진 수준”이라는 게 서울대 법대 관계자의 말이다.
김동희 서울대 법대 학장은 “제도를 만들어내는 이들 부처의 성격상 지금과 같은 지원자 감소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개인적으로는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행정 각 부처나 외교부로 제자들의 진출이 활발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일러스트 정인성 기자 71j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