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학석사(MBA)와 법학박사(JD) 학위를 갖고 있는 잭슨 교수는 법 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전문지식도 풍부해 수업이 생동감있기로 유명하다. 이곳의 상당수 교수들이 잭슨 교수처럼 전공 분야와 관련해 복수 학위를 갖고 있어 현장과 밀접한 강의를 한다.
이날은 증권거래법 시간. 99년 9월부터 이곳에서 법학석사(LL.M.) 과정을 밟았던 김도영 변호사(현 김&장 법률사무소 근무)는 전 시간에 주어진 100쪽 분량의 과제물을 매만지며 ‘오늘은 무슨 주제로 질문 공세를 퍼부을까’ 내심 궁금해 했다.
지난 시간에 질문 대상자로 지정해 두었던 열명 중 한명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수업은 시작됐다. ‘증권사의 잘못된 투자권유로 투자자들이 손실을 입었는데 회사에 배상책임이 있나’라는 첫 질문에는 잘 넘어갔다. 문제는 잭슨 교수가 같은 학생에게 연이어 던진 질문. ‘그럼 회사가 투자자를 속일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자 잭슨 교수는 이 학생에게 또 질문을 던졌다.
불행히도 이 학생은 하버드 로스쿨 학생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동료들 앞에서 망신당해선 안 된다’는 제1의 생존수칙을 어긴 것. 흔히 하버드로스쿨 교수들은 준비를 안 해온 학생들을 나무라기보다는 이 같은 질문공세로 스스로 창피를 느끼게 한다. 미국 50개주와 전 세계 60개국에서 자부심을 갖고 하버드로 몰려든 학생들에게 이보다 더 효과적인 ‘체벌’은 없다.
강의시간 내내 노트북 컴퓨터에 주요 판례에 대한 질문과 답변 내용 및 교수의 코멘트를 치느라 손가락 쉴 틈이 없다. 잭슨 교수가 농담을 할 때 게임이나 인터넷을 잠깐씩 즐기다가도 강의가 다시 시작되면 재빨리 ‘필기 모드’로 돌아온다.
“망신 당하지 않으려면 죽자 사자 공부에 매달려야 한다. 1학년의 경우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깝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매년 수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포기하는 학생들이 나왔다.”(김도영 변호사)
하버드 로스쿨은 이 같은 질문-답변식의 수업방식을 ‘소크라테스적 방법론(Socratic method)’이라고 부른다. 주요 판례를 놓고 질문과 답변를 통해 ‘왜 이런 판례가 내려졌는지’에 대한 실무적인 감각을 익힌다. 이 같은 수업방식에 대해 하버드 로스쿨 학생들이 갖는 자부심은 대단하다. 20세기 초 하버드 로스쿨 학장을 지냈던 올리버 랭델이 이 같은 수업방식을 도입한 뒤 미국의 모든 로스쿨이 이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 로스쿨이 도서관의 이름을 ‘랭델 도서관’으로 명명한 것도 그만큼 ‘소크라테스적 방법론’을 하버드의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국내 굴지의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Y씨는 아직도 97년 하버드 로스쿨에서 만났던 울프먼 교수를 기억하고 있다. 70세가 넘는 고령에도 울프먼 교수의 강의시간은 TV드라마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에 나온 킹스필드 교수의 강의를 연상시킬 정도로 살벌했다. Y변호사는 “노구를 이끌고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데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서울대 법대 시절의 강의와 대비돼 인상이 더욱 강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교과서 한 권을 제대로 뗀 적이 없고 휴강이 잦았던 기억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버드 로스쿨의 강의는 법대 교수들만 맡는 것은 아니다. ‘정부와 산업규제’과정의 경우 하버드 행정대학원과 법과대학이 공동으로 개설하며 ‘법경제학 연구 세미나’는 경제학과와 공동으로 진행한다. 양 학과의 교수가 공동으로 강의하며 법과 대학생으로서 경제학적 배경이 있는 학생과 경제학과 학생으로 법을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참여한다.
이 같은 공동강의는 ‘실무 중심의 법학교육’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하버드 로스쿨에는 260여개의 강의와 세미나가 마련되어 있다. 채권 채무자 협상기술 등 전문화되고 실무적인 강좌가 있다. 인디언의 인권, 동물의 권리 등의 제목이 드러내듯 교과과정이 세분돼 있으며 그 스펙트럼도 넓다. 학생들은 듣고 싶은 강좌를 순서대로 적어 넣으면 자리가 나는 대로 원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인 칼라일그룹 김용현 차장은 “학생들이 변호사가 되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철저한 실무 위주의 강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교재도 철저하게 주요 판례 위주로 구성돼 있다. 매 시간의 과제는 100쪽 분량의 판례 5, 6개를 읽어오는 것. 교수는 학생들이 여러 판례를 정신없이 읽는 과정에서 생기는 혼란을 교통정리해 준다.
미국 내 로스쿨 랭킹에서 1위를 고수해왔던 하버드 로스쿨은 지난해 US뉴스&월드리포트지의 랭킹조사에서 3위로 밀려났다. 1위는 예일대 로스쿨이 차지했다. 최근 하버드 로스쿨은 대형 강의 위주라 교수와의 1 대 1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해지는 문제점이 지적된다. 그럼에도 한국으로 돌아온 하버드 로스쿨 출신들은 그 시절의 수업에 대한 기억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미국의 로스쿨 제도
주로 외국인 대상의 1년짜리 과정인 LL.M.(Master of Laws)과 미국인이 주로 밟는 3년 과정의 J.D.(Juris Doctor), S.J.D(Doctor of Juridical Science)가 있다. JD의 경우 1학년은 필수과목 2, 3학년은 선택과목을 듣는다. 대부분의 법률회사들이 1학년 과정을 마친 학생 중에서 ‘입도선매’로 신입 변호사를 뽑기 때문에 1학년 때 성적이 법률인으로서의 평생을 좌우한다. 진로가 결정되면 변호사 자격시험은 대부분 통과하기 때문에 2, 3학년 때는 다소 여유를 갖게 된다.
국내에서 로스쿨에 진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LLM과정에 등록한다. 주요 법률회사들이 3∼4년차 변호사를 연수 차원에서 보낸다. 대개 20학점(7개 과목)을 듣는데 필수 1과목을 들으며 나머지는 선택과목. JD과정에 비하면 학업부담이 덜하다. 법조계에서는 여전히 ‘국제적인 법률수요가 늘어나 로스쿨을 다녀와야 한다’는 쪽과 ‘우리나라와 미국의 법체계가 달라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