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안츠제일생명에서 근무하던 여직원 김모씨(34) 등 4명이 사직서를 낸 것은 98년 8월. 당시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인원 감축이 불가피해지자 회사측은 부부사원들을 대상으로 사퇴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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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회사 상사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부인이 사표를 쓰지 않으면 승진불가 등 인사상 불이익을 주겠다”며 수차례 사직 설득을 요구하자 결국 사표를 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사퇴한 사내 부부 88쌍 중 86명이 여성이었다.
이후 김씨 등이 낸 소송에서 가장 큰 쟁점은 여성 사원들의 퇴직이 회사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개인 판단에 따른 ‘자발적인 행위’였느냐이다.
여사원들은 “남편에 대한 우려와 부부 관계마저 깨질 수 있다는 압박감 등을 견디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사표를 냈다”고 주장했다. 회사측은 “대규모 인력조정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직원들과의 합의 아래 이뤄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1심 재판부는 여성 스스로 사표를 냈으므로 회사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서울고법은 “회사가 퇴직을 계속 반복적으로 종용하는 방식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자발적 사직의 외형만 갖췄을 뿐 실질적으로는 사직할 뜻이 없는 근로자에게 사직서 제출을 강요한 부당해고”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본인이 아닌 배우자에게까지 불이익이 갈 경우 여성들이 받게 될 압박감과 우려가 훨씬 커진다는 점과, 우월적 지위에 있는 회사의 강요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도 인정했다.
여성계는 이번 판결을 크게 환영하고 있다. 여성민우회는 “남성들에게 억눌려온 여성들이 이제는 외부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에 따라 원하는 사회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판결”이라며 “여성에게 우선적인 희생을 강요해온 잘못된 관행에 경각심을 울렸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고법에는 750여쌍의 부부사원 중 1명씩이 비슷한 이유로 사표를 쓴 농협 전 여직원들이 낸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재판 결과가 주목된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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