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단 이대로 둘것인가]출퇴근 전쟁 "일할 힘 다 빠져요"

  • 입력 2002년 3월 24일 18시 45분


22일 오전 8시15분.

경기 시흥시 시화공단에서 가까운 서울 지하철 4호선 정왕역 출구. ‘출근길 수송 작전’에 나선 미니밴과 승용차가 공단으로 향하는 도로의 한 개 차선을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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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발굽 소리 같은 ‘다다다다’ 소리와 함께 급하게 역을 빠져나온 공단입주업체 직원들이 ‘접선 장소’에서 대기 중인 ‘수송 차량’에 올라탄다. 수송팀과의 교신 이상이나 시간 착오로 ‘접선’에 실패한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아무 차에나 ‘얹혀 가기’를 시도한다.

이런 풍경은 꼭 이날이 아니라도 거의 매일 오전 8시부터 15분 간격으로 4, 5차례 보게 된다. 자동차로 정왕역에서 멀면 20여분이나 걸리는 시화공단은 대중교통이 마땅치 않아 ‘섬’이나 다름없다. 열악한 교통환경 때문에 기업은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 통근 차량 유지비나 직원 교통비로 인한 부담도 만만찮다.

▽가장 큰 일은 출퇴근〓정왕역에서 공단까지 시내버스 3개 노선과 마을버스 1개 노선이 있다.

차들이 공단 안의 도로에 두겹 세겹으로 주차돼 있다.
시내버스는 공단을 한 차례 가로지르는 정도여서 큰길가의 몇몇 업체를 제외하고는 출퇴근 때 이용할 수 없다. 겨우 2대뿐인 마을버스는 30분 이상 기다리는 것이 예사. 본보 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결과 오전 8시부터 9시 가까이까지 마을버스는 한 대도 오지 않았다.

매일 아침 정왕역에서 버스 기다리는 시간만 40여분이 걸린다는 D업체 채모씨는 “시화공단으로 출근한 지 1주일째인데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고려중”이라고 말했다.

공단 입주업체들은 최근 경기가 회복기미를 보이면서 주문 물량이 늘었으나 교통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자코휘트니스 박웅규 사장은 “공장이 파주에 있을 때보다 월급을 20만원 많이 주지만 새로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털어놨다.

또 다른 A사의 조모 상무는 “시화공단으로 옮겨 온 후 교통비 15만원씩에다 통근용 미니밴 운영비, 운전기사 인건비 등으로 교통 관련 부대비용이 월 700만원 가량 늘었다”고 설명했다.

퇴근은 더 문제. 출근길에는 미터요금보다 비싸게라도 택시를 이용할 수 있지만 퇴근할 때는 미리 약속한 ‘카풀’차량이나 통근버스를 놓치면 다른 방법이 없다. 일감이 몰려 야근을 해야 하는 날도 오후 6시에 무조건 퇴근해야 한다.

임금 수준에 관계없이 자가용을 사는 사람도 많다. 1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한 전자부품회사에는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직원이 90여명. 면허증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차가 있는 셈이다. 회사 내에 주차공간이 충분치 않아 공단 내 도로에는 차가 이중 삼중으로 세워져 있다.

시흥시는 지방세의 30%를, 안산시는 15%를 거둬들이지만 공단 지원에는 인색하다. 입주업체들은 안산시와 시흥시 등에 “시내버스 노선을 늘려달라”고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적자가 나기 때문에 버스회사들이 가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선은 더디기만 하다.

인천에서 이주해온 한 철강업체 사장은 “안산시는 심지어 쓰레기봉투까지 가정용보다 비싸게 받고 있다”면서 “이 곳에 왜 왔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

▽머나먼 ‘은행 길’〓총 11만여명이 일하는 반월·시화공단 내에 은행 점포 수는 9개. 그나마 2, 3개 은행씩 모여있기 때문에 은행이 있는 지역은 4군데뿐이다.

공단 내에 식당 등 편의시설이 부족해 컨테이너 식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J사의 김모 부장은 “은행까지 걸어가려면 30분 넘게 걸린다”며 “경리사원이 운전을 못하면 사장이든 임원이든 직급에 관계없이 운전기사로 따라 나서야 할 형편”이라고 말했다. 은행이 적다보니 한 번 은행업무를 보는 데 20여분을 기다리는 것은 보통. 월말에는 대기인 수가 100명 넘어가는 것도 예사다.

5개 지역, 면적으로는 시화공단 전체의 6% 가량이 주유소 쇼핑센터 은행 교육기관 탁아소 등의 ‘지원시설’로 지정돼 있지만 실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유통센터 등을 지을 만한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기가 쉽지 않아 분양이 덜 됐기 때문.

또 5군데 지원시설지역이 공단을 에워싸는 형태여서 ‘사각지대’에 놓인 기업도 많다. E사의 한 직원은 “사무실 비품을 살 때도 차를 타고 한참 나가야 하고, 자장면 하나 시켜 먹을 곳도 없다”고 말했다.

공단 안에 편의시설이 없다 보니 무허가 ‘컨테이너 식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컨테이너를 세워놓고 간단한 식사와 음료수 등을 파는 곳. 무허가 식당에서는 세금계산서를 끊어주지 않아 경리 직원들은 식대비를 경비처리하기 위해 영수증을 수집하러 다니는 것이 주요 업무라고 하소연한다.

시화공단 조성과 설계를 담당했던 수자원공사측은 “시화공단은 다른 산업단지보다 지원시설 부지가 많은 편”이라며 “올해 안에 유통센터 등의 분양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해명했다.

▽네모 반듯한 미로〓‘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구획지어진 공단 내부는 길을 찾기에는 더없이 좋아 보인다.

그러나 기자는 자동차로 40분을 헤매고서야 한 입주업체에서 약1㎞ 거리에 있는 다른 회사로 갈 수 있었다. 도로 안내 표지판이 거의 없어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 청송중앙알미늄에 근무하는 김수현씨(23·여)는 “입사 면접을 보러 올 때 택시기사도 길을 찾지 못해 고생했다”며 “무늬만 바둑판인 미로”라고 공단을 표현했다.

가로등은 왕복 4차로 이상 도로에만 있고 신호등은 대기시간이 길어 대부분 ‘무시’하고 달린다. 자연히 교통사고도 많다. 올 1월 시화공단에 온 한 중소기업은 2개월 반만에 직원 3명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표지판 등 도로 관련 시설물 설치는 공단 조성을 담당한 수자원공사와 시설물 관리를 인수인계받은 시흥시가 밀고 당기면서 미뤄지고 있다.

98년 시흥시는 공공 지구의 시설물 관리를 지자체가 담당하는 것이 부당하므로 도로 표지판 등은 공단조성 시행자인 수자원공사가 해야 한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으나 기각됐다.

시흥시청 관계자는 “99년 12월 시화지구 공공시설물 인수인계 협약을 맺을 때 수자원공사가 도로표지판 설치비로 7억5000만원을 지급했으나 겨우 주거지역에 우선적으로 설치할 수 있는 정도였다”며 “올해 시 예산중 10억원을 공단내 표지판 설치비로 책정했지만 시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불편하지 않게 시설물을 갖추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반면 수자원공사측은 “시설물은 지자체나 경찰 등과 협의해야 하므로 임의로 설치할 수 없다”며 “시흥시가 요청한 설치비를 협의해 이미 지급했다”고 반박했다.

시흥·안산〓천광암기자 iam@donga.com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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