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마라톤 완주한 시청각장애 차승우씨-도우미 박복진씨

  • 입력 2002년 3월 25일 18시 24분


시청각장애인 차승우씨(오른쪽)와 도우미 박복진씨
시청각장애인 차승우씨(오른쪽)와 도우미 박복진씨
《17일 열린 2002 동아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는 한 편의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가 펼쳐졌다. 42.195㎞의 풀코스를 완주해 진한 감동을 준 시청각 장애인 차승우(車承祐·39)씨와 그의 도우미 박복진(朴福鎭·52)씨가 드라마의 주인공들.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을 출발해 서울역→동대문→어린이대공원 등을 거쳐 강남 잠실운동장에 이르는 풀코스를 이들은 내내 함께 달렸다. 박씨는 왼손에 방울낚시용 종을 매달아 ‘딸랑딸랑’ 흔들고 오른손을 70㎝ 길이의 흰색 운동화 끈으로 차씨의 왼손과 함께 묶었다. 차씨의 가슴에는 ‘16339’라고 쓰인 번호판이 큼직하게 달려 있지만 박씨의 가슴에는 번호판이 없었다. 운동화 끈이 팽팽해졌다 느슨해졌다를 반복하기 수천 번. 그들은 정확히 4시간12분37초만에 결승점에 들어왔다.》

▽마라톤과의 인연〓차승우씨는 164㎝의 키에 47㎏의 몸무게로 왜소한 편이다. 한자 이름을 묻자 시선은 먼발치에 둔 채 지갑 속에서 푸른색 장애인 복지카드를 꺼내 보였다. ‘1급 시각장애인’. 3㎝ 거리에서도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또 왼쪽 귀는 아예 들리지 않고 오른쪽 귀는 보청기를 사용해도 들릴까 말까 한 약청(弱聽)이다.

“지난해 어머니가 뇌염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결혼 후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어머니로 인해 저를 포함한 2남4녀가 모두 유전적으로 시각장애인이죠. 아버지는 88년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고요.”

그는 자신을 ‘가난 2세대’라고 부른다. 아버지가 가끔 취로사업에 나가기는 했지만 정부가 생활보호 수급대상자에게 주는 돈이 평생 주 가계수입이었다. 앞 못 보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장애자 가족에게 취업의 길은 고단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그는 3년 전 안마사 자격증을 땄다. 40분 동안 출장안마를 해 주고 받는 돈은 1회에 1만6000원. 여기에다 생활보호 수급대상자로서 받는 월 21만원과 장애인에게 지급되는 월 7만원을 합한 30여만원의 수입으로 서울 강남구 수서동 13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조용히 살아 왔다.

그러던 지난해 4월 시각장애인마라톤클럽 회원인 장애인 친구가 서울 영등포구 여의나루의 한강둔치로 마라톤 연습 간다기에 따라나섰다가 마라톤과 인연을 맺게 됐다.

▽나는 달린다〓장애인 친구를 따라간 곳에는 또 다른 마라토너가 있었다. ‘도우미’라고 불리는 그는 앞을 못 보는 장애인 친구와 손목을 함께 묶고 뛰었다. ‘하나, 둘’. 구호에 맞춰 달리는 장애인 친구는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차승우씨는 차가 다니지 않는 동네 담을 따라 뛰어보기로 했다. 마침 조깅을 나온 시민이 그가 시각장애인임을 알아보고 그들의 등뒤를 바짝 따라 달리는 것을 허락해줬다.

기분이 상쾌했다. 몸 안의 모든 엔도르핀이 짜릿하게 살아 움직이는 느낌. 그날로 차승우씨의 달리기는 시작됐다.

“한강변에서 매일 달렸어요. 비록 건강한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을 다 얻을 수는 없어도 바람소리, 나무 냄새는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달리면서 깨달음이 있었어요. ‘내가 왜 그동안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한탄하며 지냈나,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는데…’라고요.”

지난해 5월 경향마라톤대회(10㎞)에 참가해 완주한 그는 수안보마라톤대회(2001년 5월), 한국일보마라톤대회(2001년 6월), 양평마라톤대회(2001년 6월), 하남마라톤대회(2001년 7월)에 계속 참가했다.

지난해 9월 충주마라톤대회부터는 하프코스에 도전해 올 들어 거제마라톤대회(1월), 금강산마라톤대회(2월), 서울마라톤대회(3월3일)의 하프코스를 모두 완주했다. 10번째 참가 마라톤인 동아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는 비로소 풀코스도 달렸다.

“마라톤 대회 참가를 앞두고 마라톤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장애인임을 밝히면 ‘도우미’를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은 자신의 기록을 포기하고 남을 돕는 사람들이죠. 서울마라톤대회에서 인연을 맺은 박복진씨가 동아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또 다시 도와줬어요. 30㎞쯤 뛰다가 주저앉고 싶어졌는데 옆에서 ‘멋있다’, ‘장하다’라고 격려해주니까 힘이 솟아났어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4년 전부터 마라톤을 시작해 20여개의 국내외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는 도우미 박복진씨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신발을 만들어 영국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한다.

차씨와 정반대로 “삶이 너무 안정적이어서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는 박씨는 “장애인 마라토너를 돕는 일은 책임감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지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을 얻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동아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를 3시간23분03초로 달려 자신의 최고기록을 세운 박씨는 다음달 미국 보스턴에서 열릴 국제마라톤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다. 매일 서울 강동구 고덕동∼팔당대교 구간을 왕복해 달리고 술과 담배도 금하고 있다.

“여태껏 두 눈 갖고도 보지 못했던 세상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했어요. 승우씨는 온전히 제 방울소리에 의존해 완주한 후 가슴 벅찬 기쁨으로 조용히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답니다.”

▽다시 마라톤이다〓차승우씨는 “달리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마라톤 하프코스와 풀코스에 익숙해져 이제 10㎞ 마라톤은 시시하게 느껴진다는 그는 늘 외톨이였기에 슬플 때면 울어버리는 것이 습관이 됐다.

얼마 전 종영한 TV드라마 ‘겨울연가’를 보면서도 많이 울었다. 시각과 청각장애 때문에 TV를 보려면 TV 모니터 화면에 두 눈을 바짝 붙여대고 볼수 밖에 없다.

“함께 마라톤 하는 부부와 연인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요.”

그는 다음달 열리는 또 다른 마라톤대회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이렇게 계속 달리다보면 결승선에서 찹쌀떡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던 박복진씨의 부인 김영희씨(47)처럼 든든한 생의 반려자를 만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겨날 것이다.

박복진씨의 팔에 매달려 돌아서는 차승우씨의 뒷모습은 작지만 커다랗게 둥실 떠오르는 듯했다. 인간 내면의 심연(深淵)과 악수하는 마라톤의 얼굴처럼….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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