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빛 바랜 사진 속에서나 가까스로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1920년 당시 인천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항구도시, 공업도시, 국제도시였다. 3월 28일 인천학연구원 개원을 계기로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대비해 보았다.
▽1920년 인천〓한국을 대표하는 미곡 집산지자 일제가 이곳을 통해 쌀을 수탈했던 반출항구였다. 이 때문에 인천항을 중심으로 많은 금융기관과 유통회사, 산업시설이 들어섰다. 3·1운동 이후 유화정책이 실시되면서부터는 많은 민족 성향의 사회단체가 활동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압제의 현장에 항거정신이, 침탈 피해의 그늘 아래 개발의 동력이 생겨난 것이다.
당시에 있었던 건물중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은 1920년 중구 항동에 건립된 대표적 금융 기관으로 일제의 쌀 수탈 정책을 뒷받침해주는 기관이기도 했다. 광복 후 한국산업은행 건물로 이용되다 1950년대 후반에는 미군을 상대로 한 카바레인 ‘인터내셔날클럽’으로 변하기도 했다.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1990년 철거됐다.
또 웃터골과 한용단도 관심을 끄는 장소.현재 제물포고교 자리가 있는 자유공원 중턱(중구 전동)에 일제는 1920년 공설운동장을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웃터골’로 불리던 곳이다.
웃터골은 1920년 결성된 ‘한용단’과 인연이 깊다. 한용단은 당시 경인철도를 이용해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 친목단체이자 야구 동호회. 요즘의 ‘팬클럽’처럼 응원 군중을 몰고 다닐 정도였다. 1924년 어느 주말 웃터골에서 열린 ‘미신’(米信·일본인 쌀거래소 직원)팀과의 결승전에서 편파 판정으로 미신팀이 우승하자 분개한 응원군중이 상대 응원팀과 격렬히 충돌한 일도 있다. 이 때문에 2년간 인천지역에 ‘야구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웃터골은 1935년 일본인 2세 교육을 위해 인천공립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공설운동장은 현재의 남구 도원동으로 이전했다.
월미도 역시 당시 인천항과 함께 인천을 대표했다. 개항 이후 해수욕장과 유원지가 함께 갖춰진 휴양지로 이름이 높았다. 1905년경 일본이 석탄창고를 설치하면서 군 기지화 했지만 1920년부터 유원지로 본격 개발됐다. 해변에는 수영장을 비롯해 해수목욕탕), 식물원 등이 잇따라 들어섰고 1922년에는 인천∼월미도 사이에 1㎞ 길이의 둑길이 생기면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1989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면서 옛 명성을 되찾아 가고 있다.
▽2002년 인천〓인천국제공항, 인천항, 송도미디어밸리를 통해 국제도시, 첨단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삼국시대 능허대(凌虛臺)란 이름으로 불리던 때부터 1600여년 동안 ‘국제도시’로서의 자랑스런 모습을 면면히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천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토박이 비율이 낮아지다 보니 현재 인천시민 가운데는 인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3월 28일 문을 연 인천학연구원의 김선형(62) 원장은 “인천공항, 송도미디어밸리 등 하드웨어 측면에서 인천은 국제도시의 큰 틀을 유지하고 있지만 지역 정체성 등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못하다”고 아쉬워했다. 전문가들은 개항과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의 역사를 일부러 외면하려는 생각과 서울의 주변부라는 강박의식도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인천 시사편찬위원회 김양수(70)위원은 “청나라가 남한산성 앞에 세웠던 ‘삼전도 승전비’도 땅 속에 파묻혔다가 다시 세워졌다”며 “인천을 재발견하려면 내고장 역사에 대한 시민 인식을 바꾸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박승철기자parkk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