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겨레의 얼을 일깨워 광복의 문으로
1920년 4월1일 창간된 동아일보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 맞서 가시밭길을 걸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우리 민족에게 ‘무형의 정부’이기도 했다.
창간사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에 이미 “본사의 전도가 심히 험하도다. 그의 운명을 누가 가히 예측하리오. 오인(吾人)은 오직 민중의 친구로서 생사진퇴(生死進退)를 그로 더불어 한가지 하기를 원하며 기하노라”는 다짐으로 동아일보의 ‘숙명’을 예견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15일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평양에서 열린 만세 소요를 기사화하면서 창간 2주 만에 첫 배포 금지 처분을 받는다.
이어 9월25일 ‘제사(祭祀)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사설로 1차 무기정간을 당한다. 총독부는 이 사설이 일본 황실의 상징인 ‘거울(鏡)’ ‘옥구슬(珠玉)’ ‘칼(劍)’ 등 3종 신기(神器)를 비판했다는 ‘트집’을 잡았다.
1921년 2월21일 속간된 동아일보는 민족 자강 운동을 전개하면서 더욱 날카로운 비판의 필봉을 가다듬었다. 1923년 1월 물산장려운동을 제창한 데 이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고, 1924년 10월4일에는 회사 정관에 ‘주주는 조선인에 한한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동아일보는 1926년 3월6일 2차 무기정간을 당한다.
당시 소련에 있는 국제농민본부가 보내온 3·1운동 7주년 기념 메시지 ‘자유를 위하여 죽은…’을 게재했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그 이면에는 속간 이후 동아일보의 저항에 대한 일제의 불만이 누적돼 있었다. 일제는 주필 송진우(宋鎭禹·1889∼1945) 선생에게 징역 6개월을 언도했다.
동아일보의 민족 자강, 항일 독립 운동은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1927년 1월5일 인도의 비폭력 독립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동아일보에 보낸 서한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가 실렸고, 1929년 4월2일에는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동아일보에 보낸 헌시(獻詩) ‘동방의 등촉’이 실렸다.
동아일보의 저항 정신은 1930년 4월16일 3차 무기정간(미국 네이션지 빌라즈 주필의 창간 10주년 기념사 게재 건)을 거쳐 1936년 8월25일 ‘일장기 말소사건’에 이르러 만개한다. 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시상식 사진을 일장기를 삭제한 채 게재했다가 현진건(玄鎭健·1900∼1943) 사회부장 등이 구속되면서 4차 무기 정간을 당하게 된다.
동아일보는 1937년 6월3일 속간됐으나 일제의 야욕이 극에 달한 1940년 8월10일 강제 폐간돼 광복까지 5년간 침묵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반드시 독자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동아일보는 폐간사를 통해 ‘훗날’을 기약했다.
“…한번 뿌려진 씨인지라 오늘 이후에도 싹 밑엔 또 새싹이 트고 꽃 위엔 또 새 꽃이 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민주주의-조국을 국민의 품으로
광복 후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1일 타블로이드 판으로 복간된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1876∼1949) 선생이 복간을 축하하며 동아일보에 쓴 휘호 ‘경세목탁(警世木鐸)’은 일제의 압제를 딛고 일어선 동아일보의 비판 언론 전통을 광복 이후에도 계승 발전시키라는 한민족의 염원을 담은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1946년 1월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1891∼1955) 선생이 제9대 사장을 맡으면서 반공민주입국의 노선을 분명히 밝히면서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좌우익 언론의 소용돌이가 펼쳐지던 해방 공간에서 동아일보는 오직 자유민주주의만이 겨레를 살릴 수 있다는 논지를 폈다.
이후 동아일보는 이승만(李承晩·1875∼1965)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면서 형극의 나날을 걷는다. 오직 ‘독자’만이 동아일보의 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을 앞둔 1948년 8월7일 사설을 통해 이승만 정권에 직격탄을 날렸고 1955년 3월17일 시사 연재만화 ‘고바우’ 등이 빌미가 돼 정간 조치를 당한다.
같은 해 4월18일 속간된 동아일보는 1960년 3·15 부정선거 직전인 3월11일 사설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패악을 엄중 경고한다.
“…우리 국민은, ‘법이 올바로 시행되는 사회라면 형무소에 들어갈 사람들’에 의하여 지배받기를 원치않는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 사태와 관련해 4월11일 사설 ‘마산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지 말라’를 게재한 이후 4·19 희생 학생 위령탑 건립 계획 등으로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아간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박정희(朴正熙·1917∼1979)가 집권한 뒤에도 동아일보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6월3일 윤보선(尹潽善·1897∼1990) 대통령이 “혁명 정부는 민간에게 빨리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기사가 나가자 쿠데타 주역들은 김영상(金永上) 편집국장과 정치부 조용중(趙庸中) 차장 등을 연행했다.
1962년 3월 8일 ‘기한(饑寒) 속에 거둔 6순의 숨결’이라는 기사로 인해 최호(崔皓)편집국 부국장, 이혜복(李蕙馥)사회부장 등이 고초를 겪었고 같은 해 7월28일 실린 ‘국민투표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는 사설 때문에 고재욱(高在旭·1903∼1976) 부사장 겸 주필과 황산덕(黃山德·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1917∼1989) 논설위원이 구속됐다.
1972년 유신 이후 언론은 다시 한번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기자들이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해 이에 맞서자 박정희 정권은 사상 유례없는 광고 탄압으로 언론의 목을 졸랐다.
그러자 세계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독자들의 격려 광고가 이어졌고 이는 한국 언론사의 새로운 ‘신화(神話)’가 됐다. ‘동아야, 너마저 무릎꿇으면 진짜 이민 갈거야’ ‘동아일보를 보는 재미로 세상을 산다’ 등 이름없는 독자들이 작성한 명문(名文) 광고가 이어졌다.
동아일보는 1987년 1월16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특종 보도해 80년대 5공 권위주의 정권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6월 항쟁을 촉발시켰다. 90년대에 들어서도 ‘수서 비리 사건’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국정 개입 사건’ 등을 추적 보도해 다시 한번 ‘시대의 나침반’ 역할을 하게 된다.
○문화주의-보다 풍요로운 삶으로
동아일보가 최초로 벌인 문화 사업은 창간된 지 10일 만인 1920년 4월11일 시작한 단군(檀君) 영정 현상 모집. 이는 암울한 현실에서 민족의 뿌리 찾기에 나섬으로써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동아일보의 문화사업은 ‘안창남 고국비행’(1921년) ‘문맹퇴치운동’(1928년) ‘충무공 유적 보존운동’(1931년) 등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는 1925년 한국 언론 사상 처음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신춘문예’를 창설했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우리 소설과 시의 ‘정부’였던 김동리(1913∼1995) 서정주(1915∼2000)를 배출했고, 이어 박완서 조성기 한수산 이문열 이근배 송기원 안도현 등 700여명의 작가를 배출했다.
바이올린의 김남윤 강동석, 지휘 임헌정, 성악 신영옥 같은 음악계의 별들이 동아콩쿠르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1964년부터 시작된 동아무용콩쿠르와 동아연극상은 불모지대나 다름없던 한국의 무용과 연극을 꽃피우는 터전이 됐다.
또 1996년 7월 일민문화재단을 설립해 일민예술상과 동아미술제 등을 개최해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하고 있다.
체육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동아일보는 신기록의 산실인 동아마라톤대회를 비롯해 여자 정구대회, 동아수영대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등을 개최하며 한국 체육 발전에 기여했다.
이승헌기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