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논문표절 지적하자 '참고' 우겨"

  • 입력 2002년 4월 4일 18시 11분


한국에서 12년째 생활하면서 한국 고대사를 공부하고 있다. 논문이라는 것은 일종의 특허다. 어떤 내용을 누가 먼저, 그리고 논리적으로 지적했는가 하는 것이기에 특허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래서 철저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일본에서만 유통되는 논문을 한국에서는 잘 모를 것으로 생각했는지 주(註)도 달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를 보았다.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연세대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한 일본인 선배가 1998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한국인 사학자가 일본의 논문을 표절했다. 한국 근대사(일제강점기)에 관한 논문이었다. 그때 내가 지도교수에게 표절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도교수는 논문을 표절한 학자와 친구였다. 그 지도교수는 나에게 문제 삼지 말고 만나서 함께 잘 해결하자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한국인 학자의 논문이 책으로 나왔다. 그 책에는 그저 짤막하게 ‘일본 논문을 참고했다’는 언급만 들어 있을 따름이었다.”

한국에선 논문을 표절하고도 그 논문을 보지 않았다고 우기면 그만인 것 같다. 우긴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설령 학자가 자기 분야의 논문을 보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도 학자로서 잘못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그런 풍조가 정착돼 있지 않은 것 같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 연구 분야의 경우, 한국 학자들이 일본 논문을 표절하는 사례를 종종 보았다. 일본에도 논문 표절 사례가 있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뒤처리는 한국보다 엄격하다.

한국에서 표절 문제가 그치지 않는 것은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논문 쓰기의 훈련이 제대로 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견해와 남의 견해를 어떻게 구분해 표현해야 하는지, 남의 의견을 왜 존중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엄격함에 대한 훈련 부족이다.

아울러 나의 의견이 남의 의견과 다르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도 표절을 부채질하는 것 같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 페어플레이가 나오고 그에 맞는 객관적 기준이 마련될 수 있다고 본다.

시노하라 히로가타

(篠原啓方·32·일본인 유학생·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정리〓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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