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도주… 밀항종용, 청와대서 총지휘 했나

  • 입력 2002년 4월 19일 18시 18분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崔圭先)씨의 법정 진술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최씨가 진술한 대로 청와대가 최씨를 외국으로 도피시키려 한 것이 사실이라면 청와대는 이 사건의 은폐를 지휘한 셈이 되고 따라서 이번 사건은 ‘청와대 게이트’로 번지면서 현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최씨 진술의 신빙성〓최씨의 진술만으로 ‘청와대의 최씨 해외출국 시도’를 속단할 수는 없다. 최씨가 직접 청와대에서 들은 것이 아니라 해외로 도피한 최성규(崔成奎) 전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에게서 간접적으로 전해들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상 ‘다른 곳에서 전해들은’ 전문증거(傳聞證據)는 원칙적으로 증거능력이 없다.

청와대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그런 엉터리 같은 얘기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최씨 변호사들도 부인했다. 한 변호사는 영장실질심사 직후 “법정에서 청와대의 ‘청’자도 나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변호사의 말은 검찰이 “최씨가 간접적으로 그런 진술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확인함에 따라 거짓으로 드러났다. 법정 밖에서 엿들은 기자도 여러 명이다.

▽논란〓최씨의 법정 진술을 사실이라고 속단할 수도 없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여러 정황에 비춰보면 최씨 진술이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 전 과장은 14일 홍콩으로 도피하기 전 최소한 두 차례 청와대에 다녀온 것으로 확인됐다. 11일 청와대에서 노인수(魯仁洙) 사정비서관을 만났고 12일에도 청와대를 방문했다.

이어 12일 밤 최씨 등과 호텔에서 대책회의를 했다. 최씨는 회의 도중 최 전 과장에게서 청와대의 해외출국 권유 사실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또 최씨의 진술은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이다. 최씨는 법정에서 ‘청와대 출국 권유설’의 당사자로 이만영(李萬永) 대통령정무비서관의 이름을 거론했다.

이 비서관은 최씨에 대해 일면식도 없다고 말했다. 이 비서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씨도 그를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최씨가 최 전 과장에게서 이 비서관의 얘기를 듣고 법정에서 이 비서관에 대한 얘기를 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정확한 진상규명은 최 전 과장이 귀국한 이후 그와 최씨 등의 대질신문 등을 통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崔씨 영장심사 진술내용▼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崔圭先)씨가 “청와대가 나를 해외로 밀항시키기로 했다고 들었다”고 진술한 곳은 19일 영장실질심사가 이뤄진 서울지법 319호 법정.

기소 전 피의자의 구속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이 심사는 원칙적으로 외부인 방청이 허용되지 않는 비공개 재판이다. 법정 안에는 서울지법 영장전담 판사인 이현승(李炫昇) 부장판사와 최씨의 변호인 2명, 검사와 법원 직원 1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중요 사건의 경우 법원 취재기자들은 법정 밖으로 새어나오는 법정공방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하기도 한다. 이날 최씨의 ‘돌출발언’도 이 과정에서 취재진이 들은 것이다.

심사가 시작된 30여분 뒤 최씨의 변호인인 강호성(姜淏盛) 변호사는 도주 우려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최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피의자는 도망가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검찰조사에 응한 것 아닌가요.”

최씨는 여기서 말이 많아졌다. “예” “아니오”라고만 답하던 이전의 태도와 달랐다.

“정정당당히 검찰조사에 응하겠다고 했습니다. 이틀이나 설득 당했습니다. 최성규(崔成奎) 총경도 (해외로) 같이 나가자고 했는데 거절했습니다. 청와대 회의 결과 나를 해외에 보내기로 했다는 말을 최성규 과장에게서 들었습니다. 최 과장은 청와대 이민영 비서관한테서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출국금지 전날에는 모 인사가 전화해서 ‘일단 미국으로 가라’고까지 했지만 죄 없는 사람이라 못 나가겠다고 거절했습니다.”

잘 들리지 않던 최씨의 진술은 이 부분에서만큼은 똑똑히 외부로 전달됐다. 감정이 격앙된 탓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변호인단이 미리 준비해온 변론서에는 없던 내용이었다. 당황한 변호인은 혐의 부분으로 질문을 넘겼다.

최씨의 영장심사에 참여했던 검찰도 최씨가 이런 진술을 했다고 확인했다.

최씨는 각종 건설수주 청탁과 함께 S건설 손모 회장 등에게서 돈을 받은 혐의도 모두 부인했다. “사업상 ‘줄’이 필요한 사람들이 김홍걸(金弘傑)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돈을 건넸을 뿐 청탁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홍걸씨를 보호하려 했고 돈도 대신 갚았는데 오히려 안 좋은 소문만 들었다”고 덧붙였다.

최씨는 자신이 억울한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취지의 주장도 했다.

“홍걸씨와 S건설 손모 회장, 김희완(金熙完)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아 자세한 내막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억울합니다. 무죄를 입증할 자료가 있습니다.”

1시간가량의 심사가 끝난 뒤 최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법정을 빠져나갔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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