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도 자신이 52세부터 살기 시작해 84세로 돌아갈 때까지 살았던 인왕산 골짜기의 자기집 이름을 인곡유거 또는 인곡정사(仁谷精舍)라고 불렀다.
유거라는 것은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 집이란 의미이고 정사는 심신을 연마하며 학문을 전수하는 집이란 뜻이다. 모두 학문 연구를 궁극의 목표로 삼던 사대부들이 붙일 만한 집의 이름이다.
그래서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즐겨 유거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겸재의 스승인 삼연 김창흡이 태어난 집도 악록유거(岳麓幽居)였다. 삼연의 증조부 청음 김상헌이 붙인 이름이다.
인곡유거가 있던 자리는 옥인동 20 부근이다. 지금은 그 터에 군인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인곡유거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당시 겸재 댁 주소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도(漢都)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창의리(彰義里) 인왕곡(仁王谷). 그러니 인곡은 인왕곡의 준말이었던 것이다. 옥인동이라는 현 동명도 1914년 옥류동(玉流洞)과 인왕곡이 합쳐져 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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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의 탄생지는 한도 북부 순화방 창의리 유란동(幽蘭洞)이었다. 현재 청운동 89 일대이니 경복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곳으로 북악산 서남쪽 기슭에 해당한다. 겸재는 이곳에서 나서 52세까지 살다가 이후 인왕곡으로 이사와 인곡유거에서 생을 마감한다.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절정에 이르는 것이 60대 이후이고, 이 그림을 그린 80세 전후해서는 추상세계로 이를 완벽하게 마무리짓는다. 따라서 인곡유거는 겸재가 그 예술혼을 한껏 불태웠던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인곡유거는 지금 신교동과 옥인동을 나눠 놓는 세심대(洗心臺) 산봉우리를 등지고 남쪽을 향해 있었던 것 같다. 그 집을 동쪽에서 내려다보고 그린 것이 이 그림이다.
바깥 사랑방 동쪽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앉아 있는 겸재 자신의 모습을 표현해 인곡유거인 것을 나타냈지만 사실 이 그림을 그린 의도는 사랑채 앞 정원과 그 남쪽으로 전개되는 필운대(弼雲臺) 일대의 인왕산 자락이 어우러지는 그윽한 자연미의 표출일 것이다.
뜰 안의 큰 버드나무와 오동나무가 산봉우리들과 어우러지면서 이뤄내는 조화가 바로 이를 말해주는데 이엉을 얹은 초가지붕의 일각대문과 버드나무를 타고 올라간 포도덩굴에 이르면 그 세련된 안목에 기가 질린다.
이렇게 그윽한 자연미를 자랑하던 이곳을 지금 찾아가 보면 옥인파출소와 효자동사무소 뒤로 군인아파트 건물들이 살벌하게 솟아나서 그 큰 인왕산을 간 곳 없이 밀어내고 있을 뿐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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