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를 탐색하던 그는 인사 담당자로부터 “최근 일고 있는 ‘노풍(盧風)’ 때문에 고위직이 들떠 있다”며 “민주당이 재집권하면 기구가 확대될 것이기 때문에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는 말을 전해들었다.
그는 또 “기구 확대를 위해서는 노풍에 힘을 실어줄 수 있도록 투표를 잘해야 한다”는 담당자의 말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권 말기의 혼란에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힘겨루기를 하면서 정부 부처 공무원들의 ‘눈치보기’가 극심하다.
정국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중요한 의사 결정을 뒤로 미루기도 하고 심지어 혼란기를 피해 해외주재관을 자원해 떠나거나 승진을 기피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차원을 넘어 ‘복지안동(伏地眼動)’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현 정권 출범 이후 청와대에 ‘입성’했던 B씨는 최근 별다른 이유 없이 사표를 냈다. 사직 이유에 대해 그는 “원래 일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밝혔지만 평소 그를 지켜봐온 주변 사람들은 “정권 교체를 염두에 두고 일찍 자리를 뜬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한 정부 인사는 “최근 해외 주재 공관에는 현 정권 들어 잘나갔던 호남 출신 인사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며 “캐나다의 밴쿠버나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 기후 좋고 골프하기 좋은 곳이 가장 인기 있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공무원들의 눈치보기가 심해지면서 토지형질 변경과 준공 허가 등 각종 인허가 사안이나 법률 개정, 이권과 관련된 일들은 미뤄지기 일쑤다. 정권이 바뀔 경우 ‘이권에 개입했다’는 오해와 질타를 받을까 걱정해서다.
실제로 하루가 멀다하고 각종 정책을 쏟아내던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 산업자원부 등 주요 정부 부처들은 지난해 말 이후 별다른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여러 부처에 중복돼 걸려 있는 현안은 거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 상태다.
일부 공직자들은 은밀하게 야당에 중요한 자료를 건네주거나 정책 조언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세대 행정학과 이종수(李鍾秀) 교수는 “공무원의 복지부동이나 줄서기 등은 권력의 통제와 간섭이 심한 나라에서 통제가 느슨해졌을 때 나타나는 일종의 일탈 현상”이라며 “공무원이 정치에 노출되지 않도록 일정 이상의 직위에 대해서는 임기를 보장하는 보직 임기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김병섭(金秉燮) 교수는 “개방형 임용제를 확대해서 눈치보는 공무원들을 줄이고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며 “상관, 동료, 부하로부터 평가를 받는 다면평가제 등의 장치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훈기자 dreamland@donga.com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