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해서 못살겠다. 도대체 경찰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최근 수도권에서 살인 및 강도강간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자 시민들이 크게 불안해하고 있다. 이들 사건은 우리 사회에 인명경시 풍조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치안력 부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 경찰에 대한 불신감도 고조되고 있다.
분당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정모씨(27·여·경기 성남시 분당구)는 “수도 서울 일대에서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민생치안을 강조하는 경찰은 그동안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밖으로 나다닐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지난달 22일 검거된 ‘의왕 3인조 살인범’들은 올 2월초부터 검거될 때까지 두 달간 서울 강남과 강북, 경기 수원 안양 성남 의왕시를 아무 거리낌 없이 오가며 7명을 살해했다.
이번 사건은 청년들이 승합차를 이용해 범죄를 저질렀고 피해자들을 목 졸라 살해하거나 야구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하는 등 범죄수법도 유사했지만 의왕 3인조 사건이 드러난 후에도 경찰은 유사 사건 예방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한 시민은 “만일 경찰이 의왕 사건 이후 검문검색만 강화했더라도 이번 연쇄살인 사건은 없었을 것”이라며 “무고한 시민들만 희생됐다”고 꼬집었다.
경찰은 일상적인 순찰활동 외에 인접 시군간 주요 경계지점과 범죄 취약지점, 그리고 파출소별로도 수시로 검문검색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들은 경찰이 형식적인 방범활동에 많은 인력과 시간을 동원했을 뿐 효과적인 검문검색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와 함께 최근 사회문제로 대두된 신용카드 남발 및 남용 관행도 이번 사건들의 범행동기로 드러나 확실한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30일 검거된 허모씨(25)는 경찰에서 “신용카드 연체대금 8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이에 앞서 ‘의왕 3인조 살인범’들도 경찰조사결과 빼앗은 돈으로 밀린 신용카드 대금을 갚고 유흥비로 탕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급 관행이 무고한 시민을 무참히 살해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됐고 ‘신용카드 빚’이 일련의 범죄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용인〓남경현기자 bibulus@donga.com
▼[범인 허모씨 일문일답]"월급적어 신용카드 800만원 빚져"▼
20대 여성들을 연쇄 살해한 혐의로 붙잡힌 허모씨(25)는 경찰에서 “카드빚을 갚기 위해 강도짓을 했고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할까 봐 살해했다”고 태연하게 범행 동기를 진술했다.
-강도살인의 동기는….
“내가 진 신용카드 빚이 700만∼800만원이나 돼 이를 갚기 위해 달아난 김씨와 강도짓을 하기로 모의하고 김씨의 차량을 이용해 여성들의 돈을 빼앗고 이들이 신고할까봐 노끈으로 목 졸라 살해했다.”
-여성 5명을 대상으로 강도 및 살인한 방법은….
“28일 살해한 2명은 김씨의 차에 택시표시등을 달고 돌아다니다 택시인줄 알고 탄 여성들이었다. 29일 살해한 3명은 친구 사이로 보여 같이 놀자고 유인해 이 중 2명은 성폭행하고 모두 살해했다.”
-달아난 공범 김씨와의 관계는….
“모 컨트리클럽에서 식당일을 하며 알게 됐다. 김씨는 24일 좋지 않은 일로 그만뒀으며 나는 28일 월급도 적고 일도 힘들어 그만뒀다.”
-택시표시등은 왜 달았나.
“수원의 법원사거리 근처에서 택시표시등을 훔쳤다. 택시표시등을 이용하면 여성들이 쉽게 타고 범행이 수월할 것 같았다.”
-검거 당시 다른 승용차의 번호판을 훔치려고 한 이유는….
“공범 김씨가 검문에 걸리면 표시가 나니까 번호판을 바꾸자고 했다.”
-차에 실은 5명의 시신을 어떻게 하려 했나.
“처음 살해한 2명은 트렁크에 넣었다. 3명을 더 살해해 시신을 뒷좌석에 포개어 놓았다가 야산에 암매장하려고 했다.”
-사설경비업체 직원들에게 적발된 과정은….
“번호판을 훔쳐 우리 차로 오는데 경비업체 직원 3명이 달려들었다. 대응을 했지만 경비업체직원 4, 5명이 더 오는 바람에 붙잡혔다. 경찰은 없었다.”
▼[전문가들 진단]"사회지도층 제역할못해 죄의식 실종"▼
최근 잇따라 발생한 연쇄강도 살인사건은 94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 사건과 연이어 발생한 택시운전사 온보현씨 여성납치 살해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끔찍한 범행들은 사회적 병리현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8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유사한 사건이 재발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얼마나 무신경한가를 보여준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번 여성 5명 강도살해 사건과 지난달 22일 경기 수원에서 붙잡힌 살인강도 3인조의 취객 등 6명 살인사건은 범행의 대담성과 범인들이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 등에서 지존파 및 온보현씨 사건과 유사하다.
94년 당시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의 물질만능과 인명 경시 풍조, 가치관의 상실, 가정의 해체 등을 주요 원인으로 지적하면서 이런 문제들을 교정하고 치유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었다.
한국사회병리연구소 백상창(白尙昌) 소장은 “8년 전의 경고를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며 “인간 생명의 존엄성 등 사회의 정신적 가치를 이끌어야 할 종교계 학계 정치계 등 소위 사회지도층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한양대 의대 신경정신과 김광일(金光日) 교수는 “이런 ‘막가파’식 행동의 일차적인 원인은 가정에서 찾을 수 있지만 사회가 정상적이지 못할 경우 사회를 통해 발현의 통로를 찾게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사회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확실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러지 못했다”며 “범죄를 예방하는 시스템과 함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죄를 지으면 응분의 벌을 받는다는 인식을 사회구성원 모두가 갖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