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세검정을 둘러싼 비봉, 문수봉, 보현봉, 북악산, 구준봉 등 화강암봉과, 거기서 발원하는 맑은 물줄기가 모인 홍제천이 이루어 낸 빼어난 경치는 그 연원에 관한 갖가지 설(說)을 낳고 있다.
신라 태종 무열왕(654∼660)이 삼국 쟁패 과정에서 죽어간 수많은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현 세검정초등학교 부근에 장의사(壯義寺)를 지은 것도 그 절경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곳이 정자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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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주장은 이렇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때 이귀(李貴·1557∼1632) 등 반정군들은 홍제원에 모여 세검입의(洗劍立義·칼을 씻어 정의를 세움)의 맹세를 하고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격, 반정을 성공시킨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검정을 세웠다는 것.
숙종 37년(1711) 건립설도 있다. 이 해에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수비군의 연회장소로 세검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이 모두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림 속의 세검정은 영조 24년(1748)에 지어진 것이다. 겸재 나이 73세 때였다.
영조는 인조반정 2주갑(二周甲·120년)을 기념하기 위해 1743년 5월7일 창의문에 친림하여 감구시(感舊詩·옛 일을 생각하고 감회를 읊는 시)를 지으며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써 문루에 걸게 한다. 즉위 23년(1747) 5월6일에는 총융청(摠戎廳·경기지역을 관할한 군영)을 탕춘대로 옮기고 북한산성까지 수비하게 한 뒤 이듬해에 총융청 장졸들의 연회장소로 세검정을 짓게 했다.
이 그림은 세검정이 준공된 다음 영조에게 보이기 위해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는 겸재의 그림 제자로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지극히 애호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그림의 세검정은 1941년 부근의 종이공장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1976년 서울시는 이곳을 시 지정기념물 4호로 지정하고 1977년 5월 바로 이 그림을 바탕삼아 세검정을 복원해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이때 복원된 것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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