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개동 632가구 규모의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행신주공아파트 단지는 굴착기가 화단을 파헤쳐 나무를 뽑고 대형 크레인이 철거된 새시와 문짝을 옮기는 등 공사장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12일 오후에도 석면, 유리가 뒤섞인 쓰레기들이 단지 내 어린이 놀이터에 나뒹굴며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 틈으로 어린이들이 뛰놀고 있어 안전사고 위험이 높은 상황이었다.
8월부터 본격적인 재건축이 시행되기 때문에 632가구 주민 중 60여가구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는 이 단지에서 사전 철거작업이 시작된 것은 지난달 25일.
이 아파트는 9, 11평형으로 단지가 구성돼 어렵게 생계를 꾸려 가는 서민들이 주민의 대부분이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60여가구는 대부분 전세세입자들로 보증금이 2000만∼4000만원에 불과해 같은 돈으로 다른 곳에서 전세를 구하기도 쉽지 않아 기한까지는 이 단지에서 거주해야 하는 처지다.
지난해 재건축이 확정된 직후 재건축사업을 수주한 SK건설은 올 2002년 7월31일까지를 이주기한으로 주민들과 합의하고 8월부터 재건축에 들어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직 이사를 하지 않은 주민들의 생활 불편과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각종 철거작업을 미리 진행하고 있는 것.
주민들은 파헤쳐진 토사가 하수구를 막고 있어 비가 오면 물바다가 될 우려도 높고 일부 동(棟)에서는 수도에서 흙탕물이 나오는 등 공사로 인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침부터 계속된 소음과 먼지로 창문을 열어놓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기가 흐르는 전선이 주민 통행로 바로 위로 늘어져 있는 실정이다.
얼마 전에는 한 어린이가 공사로 파손된 가로등에 감전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주민 김모씨(40·여)는 “14년밖에 안된 아파트가 헐려 쫓겨나는 것도 억울한데 대기업이 약속된 날짜까지 사람답게 살게 놓아두지도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조용연씨(49)는 “건설사의 이익 때문에 서민생활이 짓밟히는데도 우리 말에 귀기울이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고양시와 재건축조합 측에 이주기한 전에 생활환경을 파괴하는 사전철거작업을 중단해달라고 수차례 요구했으나 “시공사가 하는 일이라 관여할 수 없다”는 답변만을 들었을 뿐이다.
SK건설은 약속된 7월31일까지는 공사를 중단하고 거주하는 주민들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쓰레기와 토사를 즉각 치우겠다고 밝혔다.
고양〓이동영기자 arg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