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 쌀 1318만섬…보관비 年 5900억

  • 입력 2002년 7월 28일 18시 41분


넘치는 쌀 - 안철민기자
넘치는 쌀 - 안철민기자
《남아도는 쌀이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전국 대부분의 쌀 창고가 꽉 차 더 이상의 물량을 쌓을 수 없을 지경이다. 묵은 쌀을 보관하는 데도 엄청난 비용이 든다. 소비는 줄어드는데 생산과 수입이 늘어나는 바람에 재고 증가 추세는 불을 보듯 훤히 예상됐다. 그런데도 정부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해 구조적 문제를 심화시켰다. 사료용에 대해서는 “사람이 먹는 쌀을 짐승에게 먹이느냐”는 반감이 일고 있고 대북(對北) 지원용에 대해서도 “북한의 태도가 바뀌지 않았는데 ‘퍼주기식’으로 지원하면 곤란하다”는 여론이 있다. 쌀 재고의 원인과 해결방안 등을 종합적으로 짚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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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풍년이 될 것 같다는데…. 답답해서 한숨만 나옵니다.”

27일 오후 충북 괴산군 청안면에 있는 농협 소유 정부양곡창고에서 만난 채상길(蔡相吉) 창고장은 이런 얘기를 하면서 커다란 철문을 열어젖혔다. 6m높이의 창고 천장 바로 아래까지 차곡차곡 쌓인 40㎏들이 벼 포대로 100평 남짓한 창고 안은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1999년 수확기 수매가 끝난 뒤부터 계속 이 모양입니다. 그 전해만 해도 여름철이면 3분의 1 정도 여유 공간이 생겼거든요. 공간을 비워주지 않으면 올 가을 수매할 벼를 넣을 공간은 전혀 없어요.”

곡창지대의 산지창고인데도 1만 포대가 들어찬 창고 안에는 아직도 누렇게 변색된 1999년산 벼 포대가 전체의 40%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청안면과 함께 가까운 도안면과 사리면을 포괄하는 증평농협 관내 5개 창고는 하나같이 꽉 차서 남은 공간이 없었다. 증평농협이 관리하는 미곡종합처리장(RPC)에 3800t 용량의 사일로가 비어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지역의 논 3500㏊에서 생산되는 2만1000여t 중 농민들이 수매를 원하는 6000∼7000t을 보관하는 데도 턱없이 부족해 수확기가 되면 야적(野積)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쌀 재고 얼마나 쌓였나〓올 양곡연도가 끝나는 10월 말 전국의 예상 쌀 재고량은 지난해 10월 말 927만섬보다 400만섬 가까이 늘어난 1318만섬. 이는 소비량의 16∼17%인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권장 재고량 550만∼600만섬의 갑절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올해 재고 쌀을 충분히 처리하지 못하면 내년 수확기에는 1594만섬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재고 쌀 1318만섬(189만8000t)은 11t트럭에 채웠을 때 17만2545대 분량으로 11t트럭에 실어 잇달아 세우면 서울에서 포항까지의 거리(392㎞)를 두 번 왕복하는 길이가 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박동규(朴東奎) 연구위원은 보관료, 금융비용(연리 6% 기준), 묵은 쌀의 가치하락을 고려할 때 100만섬당 연간 450억원의 재정부담이 생기는 것으로 분석했다. 1318만섬을 보관하려면 매년 5900여억원의 돈이 날아간다는 계산이다.

농림부는 올해 수확기에 전국의 창고에 남게 될 보관 여유공간을 350만섬(50만4000t)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수확기에 창고에 새로 넣어야 할 쌀은 550만섬(79만2000t). 전국적으로 200만섬(288만t)을 보관할 공간이 부족한 것이다.

▽왜 이렇게 남아돌까〓쌀 소비량은 주는데 생산은 계속 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연평균 1.0%씩 감소하던 국민 1인당 식용 쌀 소비량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식생활 서구화의 영향으로 연평균 2.4%로 줄어드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에 따라 전체적인 쌀 소비량은 1991년 3813만섬에서 2001년 3577만섬으로 10년 만에 6.2%가 감소했다.

반면 1990년대 초반까지 감소하던 쌀 생산량은 1996년 이후 쌀값 상승세가 이어지면서 재배면적이 연평균 6700㏊씩 증가하고 단위면적당 생산량도 늘었다. 1997년 이후 매년 추곡수매가를 높여 줘 쌀값이 오른 것이 주요한 원인이다. 이런 이유로 쌀 생산량은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2.7%씩 증가했다.

우루과이라운드(UR) 농업협상의 결과로 1995년부터 ‘의무적’으로 들여오고 있는 최소시장접근(MMA) 물량 수입쌀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지난해 국내 소비량의 2.5%(14만2520t)가 미국 중국 태국 등에서 수입됐으며 올해는 3%인 17만1023t, 2004년에는 4%인 22만8031t을 수입해야 한다. 올 6월 말 기준 전체 재고량 946만섬 가운데 수입쌀의 비중은 14%나 된다.

▽해결책은 무엇인가〓농림부는 오랫동안 보관해 품질이 떨어진 1998∼1999년산 쌀을 중심으로 가축에게 먹일 배합사료로 사용하고 일부는 주정용, 가공용으로 방출해 수확기 이전에 400만섬의 재고를 처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쌀을 가축에게 먹이는 데 대한 국민의 반감이 예상되고 경험이 없어 처리에 어려움이 있다.

또 정부는 쌀의 품질에 따른 수매가격을 차별화해 고품질 쌀의 생산을 높임으로써 품질이 낮은 쌀의 생산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한계농지나 농업진흥지역 바깥의 농지를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기회를 늘리는 생산량 조절정책을 펼 계획이다.

그러나 정부의 이 같은 방안들이 대증요법에 불과하며 수매제도 폐지, 쌀수입 관세화 등으로 쌀산업을 ‘시장’에 맡기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목소리도 높다.

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閔勝奎) 수석연구원은 “재고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정치권과 정부가 올해 이전까지 추곡 수매가를 계속 올려 생산을 늘리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라며 “국회가 쌀이라는 특정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현재의 제도로서는 재고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최낙균(崔洛均) 선임연구위원은 “앞으로 진행될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에서 한국이 개발도상국 지위의 유지를 고집한다면 선진국의 압력으로 의무수입물량을 대폭 늘려야 하며 따라서 재고문제도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며 “관세화를 통해 시장을 개방하는 편이 오히려 수입물량을 줄이고 생산조정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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