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당하는 농촌〓강원 원주시의 고물상에서 일하는 이모씨(47)가 20년 이상 천직으로 알고 살았던 농사일을 그만둔 것은 99년 말.
경남 산청에서 비닐하우스 4동에서 겨울딸기와 수박을 재배했으나 7000만원의 빚만 남았고 한때 노숙자 생활까지 해야 했다.
98년 말 식당을 운영하다 전남 장성군에서 축산업을 시작한 김모씨(44)도 200여만원씩 하는 한우 120마리를 1년3개월 동안 길렀으나 소값 폭락으로 1마리에 100만원 남짓에 팔아버리고 떠나버렸다.
이렇듯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전후한 시기에 실직자 등의 귀농현상이 두드러졌으나 일시적인 ‘바람’으로 끝나고 이제는 ‘탈농(脫農)’이 더 많은 편이다.
관련 통계는 이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50세 미만인 농가 경영주가 1981년에는 전체 농가의 51.2%나 됐으나 20년이 지난 2001년 말에는 20.5%로 줄었다. 60세 이상인 농가가 55.4%나 될 정도로 고령화됐다.
농가 인구도 1960년 전체 인구의 58.3%에서 90년 15.5%로 떨어졌고 지난해에는 8.3%로 10%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농촌인구의 감소와 고령화는 농촌사회의 붕괴라는 악순환을 재촉하고 있다.
특히 농가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이 80년에는 12.6%에 불과했으나 90년 42.9%로 증가했고 지난해는 85.2%로 급증했다. 이 때문에 농가 살림살이가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려워졌다는 소리가 많다.
근본적 원인은 ‘정(情)’을 붙이고 살아가기에는 농촌 현실이 너무도 팍팍하기 때문이다. 외국산 농산물의 대거 수입 등에 따른 가격 폭락과 농사 비용 및 가계비의 상승이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메아리 없는 인구 불리기〓경남 산청군은 인구를 5만명선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99년부터 전입자에게 상품권을 주고 민원을 대행해주는 등 애를 썼다. 그러나 98년 4만3456명이던 인구가 지난해 말에는 3만9863명으로 4만명선마저 무너졌다.
이처럼 농촌지역 자치단체들이 공통적으로 재정 확보 등을 위해 수년 전부터 갖가지 인센티브를 내걸고 ‘인구 불리기’에 골몰했으나 효과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경북 군위군의 경우 98년 3만1790명이던 인구가 지난해 3만4055명으로 해마다 1000명씩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하지만 유흥업소 종사자나 자녀 교육을 위해 도시에 나가 있는 부모의 주민등록을 옮겨놓은 것에 불과해 ‘속 빈 강정’인 셈이다.
▽희망은 없는가〓전국농민연합 경남도연맹 강기갑(姜基甲) 의장은 “외국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온다면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대응이 어렵다”며 “우리 농산물이 경쟁력을 가질 때까지는 정부가 책임지고 대책을 세워줘야 한다”고 말했다. 강 의장은 “정부가 농업을 생명산업이요 경제기반산업이라고 보지 않으면 해답이 없다”고 지적했다.
전국귀농운동본부 이병철(李炳哲) 본부장은 “현재의 위기는 농촌이 새로 태어나는 기회일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사람들이 도회적 삶의 비(非)건강성과 정체성 상실을 깨닫고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도모한다면 길은 반드시 있다”고 말했다.
외국 농산물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면 농업인은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소비자는 우리 농촌을 책임진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용하지만 지속적으로 번져나가는 자발적인 귀농도 농촌 회생을 기대하는 한가닥 희망이다. 귀농을 단순히 ‘직업 전환’이나 ‘거주지 이전’으로 보지 않고 ‘삶 자체의 전환’으로 생각하는 젊은층도 미약하지만 조금씩 늘고 있다.
▽정부 대책〓정부는 대통령직속 농어촌특별대책위원회를 통해 농어촌 문제에 대한 해법을 구상해왔지만 여전히 묘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28명으로 구성된 대책위에는 농어민 대표 8명이 참여하고 있다.
정부가 판단하는 농어촌 문제의 핵심은 농어업의 경쟁력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대응하기에 부족하다는 것.
농림부 김종진(金鍾珍) 농정과장은 “농업, 어업의 경쟁력 및 농가 소득을 높이는 대책과 함께 교육, 의료, 복지,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며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농어촌 문제 대책을 하나씩 구체화해 올 하반기부터 정책으로 개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원〓강정훈기자 manman@donga.com
장성〓정승호기자 shjung@donga.com
군위〓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광주〓김 권기자 goqud@donga.com
▼“퍼머컬처학교서 귀농준비 하세요”▼
‘한국 퍼머컬처 학교(Korea Permaculture Design Course)라고 들어보셨나요.’
퍼머컬처는 유기농업을 바탕으로 농촌을 살리는 방법을 총체적으로 가르치는 코스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이 학교가 지난해 강원 화천군 신대리에서 처음 열린 데 이어 올해는 8월4일부터 2주일 동안 공기 맑고 풍광 좋은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전초등학교 일원에서 문을 연다.
호주의 생태마을인 ‘크리스털 워터스’의 교육전담 단체인 ‘서스테이너블 퓨처스’가 호주에서 진행하는 퍼머컬처를 그대로 옮겨 시행하는 것. 30대 호주인 부부가 지도를 맡는다.
농업기술 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의 변화를 추구한다. 특정 주제를 던져주고 게임이나 토론을 하도록 유도하는 교육 방식이다.
집을 짓고 퇴비를 만들고 텃밭을 가꾸는 실습도 이어진다. 수생식물을 기르고 생태적 해충방제도 실습한다. 7, 8명으로 짜여진 각 팀에는 프로젝트도 부여된다. 개인이나 팀이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물물교환을 하는 방식도 실험한다. 화폐 유통에 따른 비용을 없애자는 것이 취지.
지난해에는 60여명의 농업인과 대학생, 귀농 희망자 등이 참여했다. 올 참가자는 40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문제는 재정. 한번에 1000만원 정도 필요하지만 선뜻 나서는 자치단체가 없다. 지난해에는 화천군이 지원했고 올해는 녹색공동체가 도왔다.
생태마을 연구회 사무국장 겸 귀농본부 기획위원인 임경수(林慶洙·38)씨는 “귀농한 뒤 순수 농업인들이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역할까지 맡을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퍼머컬처의 목표”라고 말했다. 전체 코스(20만원)를 이수해도 되고 4개 부문별(6만원) 참가도 가능하다. 033-257-6605, 011-784-6865
함양〓강정훈기자 manman@donga.com
▼애완견 사육… 농사… 年수입 7000만원▼
“흙은 솔직해요. 가꾼 만큼 보답하고 뿌린 대로 거두죠.”
충남 예산군 예당저수지 상류에 있는 대흥면 탄방리의 권희구(權熙球·60)씨 집은 승용차 1대가 빠듯하게 지나갈 만한 농로를 거쳐야 접근이 가능하다.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마당에 들어서면 애완견 수십 마리가 손님을 맞이한다. 200여평의 대지에 가옥은 30여평. 고추밭과 우사(牛舍)도 있다.
권씨는 3년 전만 해도 알아주는 장난감 제조업체인 ‘시앤에이치’의 상무이사였다. 그가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농촌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한 것은 농촌이 좋아서였다. 회사에 다닐 때 가끔 예당저수지로 낚시하러 왔다가 정이 든 것이다.“도시에서 거대 조직의 부품이 되기보다는 조용한 농촌에서 주인이 되고 싶어서 결단을 내렸죠.”권씨는 아직도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부인과 세 자녀의 반대가 심했으나 끈질기게 설득했다.
2000년 겨울 충남 예산의 귀농학교를 통해 지금의 집터를 소개받았다. 퇴직금을 포함해 모두 6000만원을 들여 집을 고치고 논과 밭 3000평도 매입했다.최근에는 예당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별장용 주택지 300평도 매입했다. 농사일과 소 3마리, 애완견 30마리를 관리하는 게 하루 일과이며 아침저녁으로 인근 야산을 산책하는 것은 큰 즐거움 중 하나. 수입도 괜찮은 편이다. 심심해서 키우기 시작한 애완견이 새끼를 낳기 시작해 1마리에 연간 100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소득이 한창 때 회사에서 받던 연봉과 맞먹는 7000만원 수준입니다.‘시골에서 뭐 할 게 있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할 일도, 돈 되는 일도 찾아보면 너무 많아요.”
권씨는 지금은 혼자 살지만 내년에 막내아들을 장가보낸 뒤 합류하기로 한 부인(57)과의 노후생활을 기대하고 있다.
예산〓이기진기자 doyoc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