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인천 토박이들은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갯골에 수구문(水口門)이 있었다고 해 서 수문통이라고 부르고 있다.
1930년대 말까지 제물포항 서북쪽 동구 만석동에서 송현 송림 화수동에 이르는 곳에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골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화도진도’를 보면 이 지역에 여러 갈래의 실개천이 그려져 있어 이곳에 바닷물이 흘러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수문통은 배다리 철교까지 이어져 황해도 옹진군 등에서 생산되는 채소류를 비롯해 각종 농수산품을 실은 나룻배들이 드나들었다.
인천시사 등에 따르면 수문통 갯골은 1930년대 당시 상공회의소회장이었던 일본인 요시다(田秀次郞)가 1939년∼43년에 걸쳐 화평동에서 배다리까지 ‘ㄱ’자로 꺽이는 하수로를 뚫고 하류에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수문을 설치, 바닷물을 막았다고 전하고 있다.
수문통의 번화는 세월이 흘러도 계속돼 60년대 초에는 화평파출소∼삼부 1차 아파트 구간을 중심으로 돼지고기 순대 채소류 등을 파는 상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영세민들이 운영하는 70여개의 상점중에는 돼지고기를 파는 가게가 많아 주민들은 이곳을 ‘돼지골목’이라고 불렀다. 2층 목조건물이었던 상점들은 서로서로 다닥다닥 붙어있엇는데3∼5평 남짓한 2층 방에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이 동네 토박이 권노일씨(73)는 “당시 상점 대부분이 늦은 시간까지 장사를 했는데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원한 막걸리를 걸치기 위해 자주 찾았다”고 말했다.
수문통에 얽힌 일화로는 ‘전환국’(동전을 주조하던 조폐창)을 빼놓을 수 없다.
1892년 서울에 있던 경성전환국이 현 중구 동인천동사무소 자리로 옮겨왔다. 당시 동전을 만드는 주조기를 비롯해 각종 시설을 인천까지 운반할 육로를 찾지 못해 고민하다가 한강에서 배를 띄워 강화를 거쳐 수문통으로 옮긴 것. 그 뒤 인천전환국은 1900년까지 8년간 근대 화폐를 찍어 냈다.
70년대말까지 수문통 뚝방에서는 바닷물이 들어오면 망둥이를 잡기 위해 낚시를 드리우는 한가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게 주민들의 얘기다.
수문통은 89년 송현파출소∼삼부 1차 아파트까지 복개된 후 7년 뒤인 96년 삼부 1차아파트∼화평파출소 앞 삼거리 구간이 다시 복개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구는 올 5월25일 수문통에서 ‘주민문화축제’를 여는 등 매년 주민화합을 위한 축제를 열고 있다.
대한주택공사는 94년 수문통 일대를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한 뒤 이곳에 몰려 있는 낡고 오래된 집들을 철거했다. 주공은 이 자리에 내년 3월 입주를 목표로 730가구의 아파트를 짓고 있다.
주민 김진우씨(63)는 “수문통에는 40년대 말까지 나룻배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라며 “삼부아파트가 들어선 곳에는 철도 공작창과 대우중공업의 전신인 한국기계 사택이 있었다”고 말했다.
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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