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재민들은 식수난까지 겹쳐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강릉시 노암동 노암초등학교로 대피한 강남동 주민 120여명은 먹을 물은 물론이고 화장실용 물조차 없어 곤욕을 치렀다. 김대열씨(57)는 “화장실용 물탱크에 든 물로는 밥을 짓는 데도 빠듯해 세수나 청소를 할 엄두도 못 낸다”며 “물을 아끼기 위해 화장실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인근 경포중학교 체육관에 대피한 월호평동 주민 100여명 중에는 80대 노인들이 20여명이나 돼 주민들의 걱정이 더했다.
43통 통장 김정래씨(58)는 “전날 밤 물에 잠긴 집 지붕 위에서 뜬눈으로 지샌 분들도 있다”며 “정부의 더 많은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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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이 침수된 강릉시내 8000여 가구 주민들도 방안까지 가득 찬 진흙을 걷어내기에 여념이 없지만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31일 밤에 이어 1일 밤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곳도 있어 주민들이 암흑 속에서 불안에 떨었다.
김상순씨(50·강릉시 내곡동)는 “밤새 대피했다가 1일 아침에 돌아와 보니 집안이 온통 진흙더미로 변했다”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지었다.
31일 오후 10시경 담수량 217만t의 장현저수지가 붕괴돼 온 마을이 물에 휩쓸린 강릉시 신석동 신석마을은 1일 오전 참혹한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은 온통 모래로 뒤덮였고 쓰러진 나무와 전봇대, 시멘트 구조물, 떠내려온 쓰레기 등만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상류에서 떠내려온 자동차 40여대가 진흙구덩이에 파묻히거나 뒤집혀 있고 논바닥은 하천으로 변했다. 마을 주민 100여명은 넋을 잃었다. 300여만㎡에 이르는 논밭의 작물들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마을 주민 김원기씨(50)는 “집이 흔적도 없이 떠내려가 남은 게 하나도 없어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재우씨(86·여)는 “너무 다급해 세금을 내려고 은행에서 찾아 놓은 돈도 갖고 나오지 못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태풍이 지나간 뒤 강릉시 전역은 아수라장이었다. 시가지 도로는 곳곳이 파여 나가 차량 통행마저 어려웠다. 도로 주변에는 급류에 휩쓸려 부서진 채 곳곳에 차량들이 처박혀 있었고 가정집 안방에 휩쓸려 들어간 승용차도 눈에 띄었다.
급류가 휩쓸고 간 남대천 주변은 두꺼운 콘크리트 포장까지 갈가리 갈라져 있는 등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동해상사∼포남시장 사거리는 떠내려온 오토바이와 승용차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어 참혹한 모습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물이 빠지면서 복구 작업을 해야 되지만 피해가 워낙 심각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은 통신 케이블과 전선이 침수되거나 산사태 등으로 끊겨 정전이 된데다 일부 전화도 불통돼 큰 불편을 겪고 있다.
한편 고속도로와 국도 등 강릉으로 이어지는 주요 진출입도로와 우회도로, 철도 등 대부분의 교통망이 곳곳에서 발생한 산사태와 유실, 침수 등으로 끊겨 외부와 통하는 차량운행이 통제됐다.
강릉에서 전국으로 운행하는 직행버스와 고속버스가 50여년 만에 전면 중단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31일 밤부터 1일 새벽까지 승객 1500여명이 버스터미널 콘크리트 바닥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또 강릉∼동해를 연결하는 모든 교통수단이 끊기는 바람에 이 지역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들이 도로 중간 곳곳에 발이 묶인 채 숙소를 구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강릉〓경인수기자 sunghyun@donga.com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