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에…태풍에…이젠 설 힘도…"

  • 입력 2002년 9월 5일 19시 01분


96년 4월 강원 고성군 죽왕면 구성리에 대형 산불이 났을 때의 처참한 모습. - 동아일보 자료사진
96년 4월 강원 고성군 죽왕면 구성리에 대형 산불이 났을 때의 처참한 모습. - 동아일보 자료사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 깊은 골짜기로 들어와 농사를 지었는데 수해까지 당해 이젠 죽고 싶어요.”

5일 오전 강원 고성군 죽왕면 구성리 6반 일명 구둔리 마을. 27년 전 이곳에 들어와 농사를 짓고 있다는 주민 김승환씨(63)는 “이번 수해로 1만5000여㎡의 논 중 1만3000㎡의 논이 깊이 4m 정도로 깎여 나가 추수는커녕 농지로 원상 회복조차 못할 지경”이라며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다고 한숨지었다.

15가구 40여명이 살고 있는 전형적인 오지마을인 이곳은 지난달 31일 밤 용암이 흘러내리듯 산에서 황토색 흙탕물이 밀려와 복구 불능의 상태로 변했다.

태풍 루사로 큰 피해를 본 강원 고성곤 죽왕면 구성리의 구둔리마을. - 고성=신원건기자

96년 발생한 대형 산불로 인근 산이 모두 타버린 이 마을은 이후 다시 나무를 심었지만 아직 어려 빗물을 저지하기에 역부족이라 물살이 빠른 속도로 마을을 덮쳤다.

폭 2∼5m의 실개천은 폭 40∼100m의 하천으로 변했고 물줄기를 따라 늘어선 계단식 논밭은 물살에 깎여 나가 ‘채석장’으로 변하다시피 했다. 가옥 5채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나머지 집과 축사들도 엎어지거나 갈라져 마치 폭격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한 주민의 집 벽에는 폭우로 휩쓸려온 경운기와 승용차, 트럭이 3층으로 쌓여 있어 수해 당시의 참상을 잘 보여줬다.

마을 주민들은 저지대로 대피할 생각은 엄두도 못 내고 산 위로 올라가거나 인근 부대로 피신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오미자를 키우던 권모씨(60) 부부는 시신으로 발견되거나 실종됐다. 농사일과 막노동을 하는 주민이 대부분인 이곳은 복구 자체가 사실상 어려운 상태. 60여만㎡의 농지 중 95%가 깎여 나갔을 정도로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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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이명분씨(75)는 “30년 전에 이곳에 들어와 정착했는데 이번 비로 세간은 물론 집 2채가 흔적도 없이 떠내려갔다”며 “6·25전쟁 때도 이처럼 참혹하지는 않았다”고 눈물을 흘렸다.

또 이동호씨(44)는 “가재도구는 물론 집, 축사 그리고 소 5마리와 3000여㎡의 농지까지 잃었다”며 “빚 4000여만원도 못 갚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수성리 이장 최정남씨(50)는 “96년 이 마을 산이 모두 불에 타 주민들이 밤마다 두려움에 떨곤 했다”며 “이제 비로소 풀이 돋아 푸른빛을 되찾기 시작했는데 또다시 황토색 마을이 됐다”고 울상을 지었다.

고성군에서는 이번 수해로 6명이 숨지고 5명이 실종됐으며 농경지 991㏊가 매몰되거나 유실됐다. 이재민은 859가구 2125명에 이른다.

고성〓경인수기자 sunghy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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