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앞.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학생들이 ‘궁궐 길라잡이’에게 질문을 했다.
“궁궐 바닥의 돌은 ‘박석(薄石)’이라고 불리는데요, 가죽 신발을 신은 조선시대 문무 백관이 임금님 앞에서 조회(朝會)를 할 때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런 거예요. 또 돌을 매끈하게 다듬으면 햇볕이 강하게 반사되는데, 신료들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돌의 표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었죠.”
덕수궁의 유래를 비롯해 궁궐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훤히 꿰뚫고 있는 주인공은 올 7월부터 덕수궁 안내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권은정(權恩貞·25·여)씨.
권씨는 기업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벤처기업인 ㈜이창커뮤니케이션즈에서 경영전략 업무를 맡고 있는 직장인이다. 정해진 퇴근 시간이 없는 정보기술(IT) 기업의 특성상 매일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그지만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덕수궁에 나와 오후 1시반과 3시 두 차례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권씨가 궁궐 안내 자원봉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지난해 10월. 시민단체인 한국청년연합회가 주관하는 ‘궁궐 길라잡이’ 프로그램을 학교 선배로부터 전해 듣고 자원봉사 결심을 굳혔다.
이후 3개월간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 궁중사, 풍수학 등에 대한 교육을 받은 뒤 올 1월부터 6개월간의 수습 과정을 거쳐 7월 궁궐 길라잡이가 됐다.
최근부터 권씨에게는 궁궐 안내 자원봉사 이외에 한가지 일이 더 생겼다.
권씨는 덕수궁 근처 옛 경기여고 부지에 미국 대사관이 추진하고 있는 아파트 및 대사관 신축을 반대하는 1인 시위를 일요일 오후에 1시간 동안 덕수궁 앞에서 벌이고 있다.
이 1인 시위는 한국청년연합회 등 4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덕수궁터 미대사관·아파트 신축반대 시민모임’이 주최하고 있다.
“이 부지는 원래 조선시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시던 ‘선원전(璿源殿)’이 있던 옛 덕수궁 터였습니다. 우리 역사의 신성함이 서려 있는 곳에 아파트를 짓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어요.”
우리 궁궐과 역사를 지키는 일에대한 단호함으로 봐서는 매우 보수적인 여성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올 6월부터 ‘차차차’ ‘자이브’ ‘왈츠’ 등의 라틴댄스를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퇴근한 이후 열심히 배우고 있다. 그는 3개월 간 맹연습한 끝에 초급 과정을 끝내고 이젠 중급 과정으로 올라갔다며 은근히 춤 솜씨를 자랑했다.
“평소에 배우고 싶던 라틴댄스를 추면서 몸매 관리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 일석이조예요.”
또 최근엔 한국청년연합회가 주관하는 일본어 회화 배우기 소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재일교포 학생들과 함께 금요일 퇴근한 이후에 일본어를 배운다.
대학에서 역사학(단국대)을 전공한 권씨는 시민들이 우리 궁궐의 역사와 가치에 대해 깨달아가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세계화 시대로 접어들수록 우리의 전통과 역사야말로 가장 경쟁력있는 우리만의 자산이 될거라고 확신해요. 그런 면에서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 지키는 일에 시민 모두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