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수해현장 3인 ‘나눔의 한가위’

  • 입력 2002년 9월 19일 16시 39분


이상만씨
《수재민들에게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은 반가움보다는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나눔의 한가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 큰 위안이 된다. 수해 현장에서 따뜻한 인정을 베풀고 희망을 심는 사람들의 얘기를 소개한다.》

◆보일러공 이상만씨

“추석요? 추석은 내년에 또 있잖아요.”

열흘 전부터 강원 강릉에서 물에 젖은 보일러를 고쳐주는 등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강원 원주시 대방종합엔지니어링 보일러 기술자 이상만(李相萬·35)씨. 이씨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추석 때도 집에 가지 않고 계속 수재민들을 도울 생각이다.

“보일러 가동을 못해 수재민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 가슴이 아팠어요. 얼른 동료 5명과 동생을 데리고 강릉으로 왔습니다.”

이씨는 강릉이 고향이다. 지금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리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상호리 출신. 강릉시 성산면에 사는 어머니도 수해를 당했지만 집은 무사하다는 얘기를 듣고 보일러를 고치지 못해 추위에 떠는 농민들을 찾아다녔다.

빗물에 젖은 보일러가 마르지 않자 주문진 읍내까지 나가 자비로 헤어드라이어를 사온 이씨는 보일러를 뜯어 드라이어로 밤새 말리는 등 수재민들의 보일러를 수리해 주고 있다.

세 살배기 딸이 매일 전화를 걸어 “아빠, 빨리 와”를 외치지만 이씨는 동생 상열씨(31)를 원주로 보내 추석 차례를 지내게 하고 자신은 강릉에 남겠다고 했다.

그동안 70여대의 보일러를 수리해준 이씨는 “보일러 수리는 거의 끝났지만 아직 도울 일이 많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소방관 정석환씨

정석환씨

“아버지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어려운 수재민들을 도와야죠.”

강원 강릉소방서 정석환(鄭錫煥·39) 소방사는 강릉공원묘원에 모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죄스러운 심정이다.

추석 때 태풍으로 손상된 아버지 묘를 수리하고 제사도 지내는 게 마땅하지만 계속되는 비상근무로 그럴 틈이 없기 때문이다.

정 소방사는 아버지의 묘가 크게 손상됐다는 소식을 일찍 전해들었지만 계속되는 구조작업과 수해 복구 등으로 최근에야 겨우 아버지의 묘를 찾아볼 수 있었다.

“참담한 모습으로 변한 아버지의 묘를 생각하면 답답하지만 더 큰 피해를 본 수재민들이 더 급하죠.”

그는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지난달 31일 밤 급류로 고립된 시민들을 구하려다 갑자기 등뒤에서 떠밀려온 흙더미에 깔리면서 다리를 크게 다쳤다.

병원에서는 한 달은 쉬어야 한다고 했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구조 요청과 수해 복구에 여념이 없는 동료들을 보면서 쉴 수가 없었다. 다친 다리 때문에 한동안 내근을 하다 지금은 어느 정도 나아 정상적으로 일하고 있다.

추석날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출근하겠다는 정 소방사는 “소방관으로서 수재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횟집주인 김판섭씨

김판섭씨

“산해진미는 아니지만 수고하시는 분들을 위해 이 정도 못하겠습니까.”

강원 강릉시 주문진읍 횟집연합회 대표 김판섭(金判燮·43)씨. 김씨는 추석을 이틀 앞둔 19일 자원봉사자들과 주민들의 식사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김씨는 추석 때도 주문진읍에서 수해 복구작업을 계속할 수백명의 자원봉사자와 차례상을 차릴 기력도 잃은 주민들을 위해 장덕리 일대를 중심으로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하루를 보내고 가는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도시락을 싸오지만 며칠씩 묵는 봉사자들은 끼니 해결하기가 힘들다는 얘기를 듣고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응급복구는 끝났다며 관(官)에서 추석을 맞아 일단 복구를 중지하는 바람에 힘들여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밥을 먹을 곳이 없다고 하더군요. 직접 일하는 것도 좋지만 식당 주인인 만큼 식사라도 대접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

김씨는 또 객지에서 추석을 맞게 될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추석날 아침 간단하게나마 합동차례를 지낼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복구가 끝날 때까지 힘이 되는 한 계속 무상으로 식사를 대접하려고 합니다. 빨리 복구가 끝나 관광객도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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