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필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1653∼1722)의 문인(門人)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릴 때 비록 소론이 됐지만 스승 및 벗들과의 관계 때문에 항상 노론적 성향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소론의 공격으로 경종 1년(1721)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 4대신들이 처형되고 왕세제(王世弟·왕위를 이을 임금의 아우)로 있던 영조가 환관들의 모함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과감히 나서 이들 환관들을 탄핵해 영조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때 그의 벼슬은 왕세제를 교육하는 시강원 보덕(輔德)이었다. 그러니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강경파 소론의 눈밖에 나서 벼슬자리에서 물러날 각오를 해야 했다. 이에 김동필은 경종 1년 이 낙건정을 행호 강변에 짓게 됐다.
낙건정이란 이름은 송나라때 대학자인 육일거사 구양수((六一居士 歐陽修·1007∼1072)의 ‘은거를 생각하는 시’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몸이 건강해야 비로소 즐겁게 되니, 늙고 병들어 부축하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 그 본래의 싯구다. 즉 젊고 건강할 때 은거해 삶을 즐기라는 뜻이다. 구양수가 이 시를 지은 때가 44세였는데 마침 김동필이 낙건정을 지을 때도 44세였다.
이런 내용들은 김동필의 동문 친구인 서당 이덕수(西堂 李德壽·1673∼1744)가 1726년 지은 ‘낙건정기(樂健亭記)’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도 이들과 동문이었다. 더구나 이병연은 김동필의 이종사촌 형. 그러니 겸재와 사천이 김동필의 초청으로 이 낙건정에 드나들었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겸재는 1740년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서 낙건정이 있는 행주 일대를 익숙한 솜씨로 자주 화폭이 올리게 된다.
이 때는 이미 낙건정 주인 김동필이 세상을 뜬 지 3년이 지난 뒤였지만 김동필의 둘째 자제인 상고당 김광수(尙古堂 金光遂·1699∼1770)가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서화골동 수집과 감식의 1인자로 겸재 그림을 지극히 애호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는 높은 안목으로 낙건정을 더욱 운치있게 꾸몄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그 격조높은 생활환경을 확인할 수 있다. 행호 강변에서 절벽을 이루며 솟구친 덕양산 줄기 끝자락 상봉 가까이에 큰 기와집 두 채가 있다. 이 것이 낙건정의 살림집과 정자인가 보다. 산자락 끝 편에 위치한 별채 기와집이 낙건정이라 생각된다. 여기서는 한강의 상류와 하류쪽이 모두 한 눈에 잡히겠다.
멀리 한강 하구인 조강(祖江)으로 돛단배들이 무수히 떠 있어 드넓은 바다로 이어지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절벽 아래 강가에는 주인없는 배 한 척이 돛폭을 내린 채 대어져 있고 강변에서 낙건정으로 오르는 길만 두 갈래로 훤히 뚫려있다.
고요하고 한적한 낙건정의 분위기가 실감난다. 지금은 이 부근으로 행주대교가 지나고 있어 이런 운치는 간 곳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영조 18년(1742)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 소장품.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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