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 재앙 한달]상처 얼마나 아물었나

  • 입력 2002년 9월 30일 18시 10분


태풍 루사의 피해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강원 강릉시 신석동의 마을 - 강릉=경인수기자
태풍 루사의 피해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강원 강릉시 신석동의 마을 - 강릉=경인수기자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지 한 달이 지났다. 정부는 모든 피해지역을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해 특별지원을 약속했고 많은 국민은 자기 일처럼 재해 복구를 지원했지만 이재민들은 아직도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주요 피해 지역의 복구 상황과 보상비 지급 실태, 주민들의 불만 등을 집중 점검했다.》

▼농지복구 대부분 손도 못대 "내년 농사 막막"▼

▽복구 상황〓정부는 현재 도로와 교량, 하천 제방 등 공공 시설물의 응급복구가 대체로 마무리된 단계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재민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주택과 농경지, 마을 진입로 등은 손을 대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다.

거대한 물줄기가 덮치면서 마을 농경지의 90%가 못쓰게 된 강원 고성군 죽왕면 구성리 구둔마을은 마을로 들어가는 좁다란 비포장 도로만 뚫렸을 뿐 축사와 농기구 창고 등은 여전히 처참한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 무너져 내린 산비탈과 제 모습을 잃어버린 논밭의 복구에 얼마나 걸릴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다.

교량 복구가 늦어지면서 강릉시 성산면 등 강릉시 10여개 마을은 아직도 버스가 정상 운행을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주택이 파손된 강원지역 주민들을 위해 1500여개의 컨테이너 집이 설치됐으나 520여 가구는 생활이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로 친척집이나 이웃집에 얹혀 살고 있다.

경북 김천시 구성면과 대덕면 등 5개 면 지역의 농경지에는 뻘과 자갈이 여전히 뒤덮여 있다. 논과 논 사이의 경계마저 사라진 곳이 많아 서둘러 정리하지 않을 경우 내년 농사도 어렵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

여환정(呂煥正) 구성면장은 “자갈밭으로 변해 버린 논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흙이 필요하지만 농민들의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며 정부 차원의 대책을 요구했다.

강원과 경남북, 전남도 등은 30일 정부가 피해 복구비를 확정해 통보해옴에 따라 항구적인 복구를 위한 설계와 지방비 조달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 지역 자치단체들은 지방비 부담액의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피해 보상〓정부는 추석을 앞둔 17일 이재민들에게 특별위로금과 구호비를 지급했다.

경남의 경우 8월 초의 집중호우와 태풍 루사의 피해 주민들에게 총 171억원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농작물 침수에 따른 위로금이 78억원으로 가장 많고 침수 주택 53억여원, 주택전파 21여원 등이다.

강원도의 피해 주민들도 가구당 위로금으로 300만원 안팎을 받았다. 강원도는 이재민 구호비 가운데 83%가량을 지급했으며 나머지도 서둘러 지급한다는 계획이다.

경북도는 피해 정도에 따라 200만∼500만원씩 총 127억원의 특별위로금을 지급했다.

농작물 피해에 대한 위로금은 농가당 보유 농지가 2㏊ 미만이면서 80% 이상의 피해를 본 경우 270만원, 50∼80%는 130만원을 주고 있다. 농지 면적이 이보다 많거나 피해 정도가 50% 미만이면 위로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나마 농작물 대파비용과 가축 입식비용 등 간접지원은 계속 늦어지고 있다.

▽주민 불만〓강릉시 송정동 농민들은 “태풍으로 대부분의 벼가 쓰러져 기계수확을 할 때보다 인력이 몇 배나 더 필요하다”며 “일손 부족으로 수확을 포기해야 할 판”이라고 한숨지었다.

양양군 하월천리 이용인(李鎔仁) 이장은 “특별재해지역으로 지정됐지만 정부 지원은 형편없다”며 “표고버섯 종균이 접종된 참나무를 피해 지원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도 주민들의 불만”이라고 전했다.

강릉 지역의 3600여 상가와 점포들도 1200억원대의 피해를 봤으나 위로금 이외에 복구 지원금이 나오지 않아 상인들의 불만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전남 신안군 임자면 주민 20여명은 27일 신안군청에 몰려가 “벼 이삭이 하얗게 변하는 ‘백수현상’ 등으로 수확이 불가능한데도 비교적 태풍 피해가 적은 밭 면적을 포함시켜 농지면적을 계산하는 바람에 위로금을 받지 못하는 가구가 많다”며 시위를 벌였다.

경남 함안군 백산제방 붕괴 피해 주민대책위원회와 김해시 한림면 수해대책위원회도 27일과 30일 각각 집회를 갖고 “보상액이 현실을 무시한 데다 농경지 면적이 넓은 농가를 지원 대상에서 뺀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시정을 촉구했다.

태풍 루사로 인한 수해 피해 및 복구 현황
사망·실종자피해액재해복구비 재해복구현황
246명(사망 213, 실종 33명)5조1479억원7조1483억원중앙정부지원 5조5367억원정부, 9월27일 ‘수해복구추진종합지원단’ 구성하고 지방자치단체에 수해복구지침 하달.
지방비지원 8590억원
수재의연금 814억원
융자, 본인 부담 6712억원

창원〓강정훈기자 manman@donga.com

강릉〓경인수기자 sunghyun@donga.com

김천〓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식수 없어 지하수 마셔…수질검사라도 해줬으면"▼

김종욱씨가 30일 마을의 수해를 초래했다고 주장하는 다리를 가리키고 있다. - 강릉=경인수기자

“아들의 죽음이 타살로 밝혀진 뒤 나흘 만에 또다시 수해로 모든 재산을 잃고 나니 허망할 따름입니다.” 수해로 25평 기와집 등 모든 재산이 떠내려간 김종욱(金鍾旭·66·강원 강릉시 강동면 언별리)씨는 연이은 ‘불운’에 허탈해 했다.

김씨는 86년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몸에 콘크리트 덩어리를 매달고 익사한 채 발견된 서울대생 김성수(金成洙·당시 18세)씨의 아버지. 김씨는 8월 27일 아들의 죽음과 관련해 “경찰이 사건을 자살로 몰아가기 위해 수사 결과를 조작한 정황이 있다”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를 접했으나 이를 슬퍼할 겨를도 없이 수해를 당하고 말았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책임이 있는 공무원이 잘 해야 억울한 국민이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김씨는 “90년 말 강릉시가 주민들의 반대와 설계변경 요구에도 불구하고 마구잡이 식으로 놓은 마을 진입 다리 때문에 물길이 바뀌어 엉뚱하게 집 4채가 떠내려갔다”며 자신이 당한 수해가 ‘인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다리는 길이가 10m 정도밖에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중간에 2개의 교각을 만들었으며 결국 이 교각에 나무와 토사가 걸려 물길을 돌려놓았다”고 말했다.

그는 집을 잃은 뒤 마을에 마련된 5.5평 크기의 컨테이너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이 곳에는 6개의 컨테이너가 마련돼 있으며 모두 6가구의 마을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김씨 부부는 도에서 주는 구호양곡과 정부에서 준 400여만원의 위로금으로 끼니를 잇고 있다. 아직 집을 새로 지을 엄두를 못 내고 있을뿐더러 물에 잠긴 동네 전체가 하천에 편입되다시피 해 새로 집을 지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김씨는 “정부가 가옥 신축에 드는 비용의 60%를 이재민이 부담하도록 한 것은 수천만원씩의 빚을 지고 있는 농민들의 빚을 더욱 가중시키고 결국은 파산을 초래할 것”이라며 “수해 주민과 대화하고 고민을 들어주는 행정이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현재 컨테이너에 사는 이재민들이 임시변통으로 인근의 지하수를 먹고 있으나 수질검사를 해주지 않아 불안하다”며 “농지 복구는 어떻게 해 주는지, 집은 언제 지어도 되는지 찾아와서 설명해 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강릉〓경인수기자 sunghyun@donga.com

▼굴착기 가져와 김천서 20일째 자원봉사 신종윤씨▼

“굴착기가 필요한 일이 많은데 그만둘 수 없죠.”

수해지역의 응급복구가 마무리되면서 군장병과 공무원, 자원봉사자들이 대부분 철수했지만 굴착기 기사 신종윤(申鍾潤·31·경기 안산시·사진)씨는 아직도 이재민을 돕고 있다. 30일로 20일째.

신씨는 첩첩산중인 경북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 해발 600m 고지대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굴착기 작업으로 이재민들의 복구를 돕고 있다. 경운기가 오르내리던 농로였지만 폭우로 유실돼 굴착기가 아니면 도저히 길을 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경기 파주시와 동두천시의 수해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필요한 장비가 굴착기더라고요. 10월 초순까지 복구를 도운 뒤 안산으로 갈 생각입니다.”

신씨는 고향인 경북 상주시에서 가까운 김천지역이 큰 수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9월 11일 자신의 4t 트럭에 굴착기 1대를 싣고 무작정 김천으로 달려왔다. 그는 김천시 대덕면 주민들에게 굴착기가 꼭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면사무소 숙직실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TV에서 본 것보다 피해가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3, 4일 정도 작업할 생각으로 왔는데 그게 아니에요. 응급복구를 했다고 하지만 고지대 농로를 비롯해 마을 구석구석 굴착기가 아니면 손대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굴착기 기사 경력 10년째인 신씨는 굴착기 운전에 필요한 기름만 제공받고 복구작업을 해주고 있다. 미혼인 그는 “주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좋다”며 활짝 웃었다.

이 마을 정재수(鄭在洙·49) 이장은 “농로 복구가 가장 시급한 일인데 사용료가 하루 20만원이 넘는 굴착기를 자체적으로 임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험한 골짜기까지 굴착기를 몰고 와 복구작업을 해 줘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김천〓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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