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4000억 대출압력 우선 규명"

  • 입력 2002년 10월 9일 18시 59분


검찰이 산업은행에 대한 4900억원 대출 압력 의혹 사건의 수사 범위를 놓고 고심 중이다.

수사 범위를 결정짓는 핵심 사안은 대출된 돈 가운데 4000억원의 사용처를 밝히는 수사를 하느냐 여부이다.

검찰 관계자는 9일 이 사건의 성격을 묻는 질문에 “명예훼손 사건”이라고 대답했다.

한광옥(韓光玉)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이근영(李瑾榮·현 금융감독위원장) 전 산업은행 총재에게 현대상선에 대한 4900억원 대출 압력을 행사했다는 엄낙용(嚴洛鎔) 전 산업은행 총재의 말이 사실인지를 가리는데 수사의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미이다.

한 전 실장이 “대출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없다”며 엄 전 총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기 때문에 대출 압력 행사가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수사의 목표라는 것.

검찰은 그러나 추가 고발이 있거나 수사를 하면서 4000억원의 대북 전달 관련 단서가 나올 경우 계좌추적을 해서 4000억원의 사용처를 밝힐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검찰 관계자가 이날 “수사계획을 세우고 있는 단계에서 ‘계좌추적을 한다, 안 한다’를 얘기할 수가 없다”고 말한 점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검찰의 분위기는 4000억원 사용처에 대한 수사는 내키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왜 ‘4000억원의 사용처는 수사 대상이 아니다’라고 단정짓지 못할까.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4000억원 대북 비밀지원 의혹’과 관련해 정권의 비리를 드러내는 파괴력 있는 단서를 추가로 폭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따라서 이 경우 사용처에 대한 수사 확대는 불가피해질 것이기 때문에 수사 범위를 제한하지 못하고 있다는 관측이 많다.

또 검찰 내부에서는 이 사건을 ‘수많은 지뢰와 연결된 뇌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잘못 건드리면 연쇄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검찰 간부는 “대출된 돈 가운데 상당액이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첩보도 있다”고 말했다.

대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정치권을 상대로 수사를 하는 게 부담스럽지만 이런 첩보를 무시할 수도 없어 수사 범위를 제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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