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27>설평기려

  • 입력 2002년 10월 11일 17시 47분


설평기려(雪坪騎驢)는 ‘눈 쌓인 벌판을 나귀 타고 가다’라는 뜻이다. 겸재가 영조 16년(1740) 초가을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 그해 겨울에 그린 그림이다. 겸재의 벗인 사천 이병연이 동지 이틀 전에 보낸 편지를 통해 그 직전에 이 그림이 그려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겸재가 겨울 어느날 새벽에 일어나(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오전 3시에서 5시 사이인 인시(寅時)에 일어나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인 술시(戌時)에 잠자리에 드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방문을 열어보니 온 천지가 새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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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을 따라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던가 보다. 그래서 삿갓과 눈옷을 차려입고 나귀에 올라 아무도 몰래 동헌을 빠져나와 정처 없이 길을 나섰던 듯하다.

삼문 앞의 고목 밑을 지나니 양천 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끝에 우장산(雨裝山) 두 봉우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의 눈 경치는 대상의 윤곽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법이라 우장산 두 봉우리도 실제 이상으로 윤곽이 분명하다.

나무마다 눈꽃이 만발하고 산과 들은 온통 눈뿐인데 동 터 오는 새벽 하늘에는 아직 어둠기가 남아 있다. 그러나 우장산 아래 양지바른 마을에는 새벽 햇살이 얼비친 듯 소나무 숲 사이로 번듯번듯 솟아 있는 기와집 울 안에는 새벽빛이 붉게 물들어 있다.

눈 덮인 우장산 산마루와 골짜기에도, 양천 들의 둑길과 까치내 주변 논두렁에도, 겨울 아침해의 붉은빛은 점점이 물들여진다. 갈 곳은 나귀에게 맡긴 채 아무도 다니지 않은 새벽 눈길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떠난 나들이길이니 그 흥취가 어떠했겠는가. 시정(詩情)과 화흥(畵興)을 아는 겸재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었다.

이런 감흥을 겸재는 ‘눈 쌓인 벌판을 나귀 타고 가다’라는 제목으로 이처럼 그려냈다. 아마 겸재는 우장산 아래 어느 마을을 찾아가면 반가운 설중매(雪中梅)라도 피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천은 이 그림에 이런 제화시를 붙여 놓았다. ‘길구나 높은 두 봉우리, 아득한 십리 벌판일세. 다만 거기 새벽 눈 깊을 뿐, 매화 핀 곳 알지 못하네(長了峻雙峰 漫漫十里渚 祗應曉雪深 不識梅花處).’

사실 이런 감흥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시나 그림으로 표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뭇 사람을 감동시키는 시나 그림이 몇 백 년에 한 번씩 출현하는 대가들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겸재의 ‘설평기려’와 같은 내용을 뒷날 추사체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는 독특한 글씨로 이렇게 써놓고 있다. ‘꽃 찾아 목숨 아끼지 않고, 눈 사랑에 항상 얼어 지낸다(尋花不惜命 愛雪常忍凍).’

겸재가 나귀 타고 떠나는 곳은 지금 서울 강서구 가양동 239 부근의 양천현 현아 입구이고, 맞 바라다 보이는 우장산은 발산2동 우장근린공원에 해당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현재 양천향교가 있는 성산 남쪽 기슭에서 우장산을 바라보면 이 그림에서 보이는 산과 들의 모습을 그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드넓은 양천 들 안에는 아파트와 고층 건물들만 빽빽이 들어차 있을 뿐이다. 영조 16년 비단에 먹과 엷은 색으로 칠한 29.0×23.0㎝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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