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안마시술소들이 올해 들어 대부분 증기탕으로 업태를 바꿨다. 월드컵 특수도 있지만 내심 정권말기에 단속이 느슨해질 거라고 본 것도 사실이다. 작년만 해도 이렇게 집중적으로 수십군데씩 업태를 바꾸지는 않았다.”(서울 역삼동 증기탕 주인)
12일 밤 서울 연세대 앞길에 불법주차하던 김모씨(29·대학원생)는 “저녁에는 몇시부터 단속요원이 안 다니는지를 대부분 알고 있다”며 “단속도 없는 마당에 주차금지 구역이라 해서 자발적으로 법을 지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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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 신드롬’이 시민들 사이에 악성 유행병처럼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정권 말기로 접어들며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특히 종전까지만 해도 소극적이던 ‘탈법’양상이 최근 들어 법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공격적 양태마저 보이는 등 위험수준에 이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무인단속 카메라를 피하는 ‘스프레이 페인트’. 속도위반 단속카메라가 촬영할 경우 번호판이 백지장처럼 보여 번호식별을 못하도록 화학처리한 ‘특수 스프레이’가 요즘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 마포구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최모씨(45)는 “이 스프레이를 찾는 손님들이 하루 5, 6명을 넘는다”며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팔기를 꺼리지만 요구가 너무 노골적이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운전자들이 번호판에 종이를 붙이거나 흙을 묻혀 소극적으로 번호판을 숨겨왔다”며 “특수 스프레이 페인트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를 뿌리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불법심리의 극치가 아니겠는가”라고 지적했다.
회사원 김모씨(28·서울 마포구 동교동)는 “단속에 걸리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아는 카센터를 통해 최근 한 개를 구했다”며 “권력층의 축재와 비리를 보면서 나 혼자만 법을 지키면 무엇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반 시민들에 비해 불법문제가 심각한 유흥업소의 ‘불법 신드롬’은 더욱 가관이다.
12일 자정 서울 강남역 주변. 거리 곳곳에는 손님을 호객하는 이른바 ‘삐끼’ 수십명이 행인들의 소매를 붙들고 있다. 이들이 소개하는 곳은 뜻밖에도 ‘노래방’.
최근 노래방은 양주를 팔거나 접대부까지 고용하는 등 마치 단란주점이나 룸살롱과 같은 불법영업이 판치고 있는 것.
거리 곳곳에는 불법을 알면서도 ‘술을 판다’는 간판을 버젓이 내건 곳이 흔하다. 한 노래방 업주는 “나 같은 경우는 일단 단란주점으로 등록했기 때문에 단속이 나오더라도 별로 문제삼지 않는다”며 “그러나 너도나도 이같이 영업을 하다보니 노래방 허가를 받아놓고도 술을 파는 곳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윤락의 대명사로 당국의 철퇴를 맞은 안마시술소가 최근 증기탕으로 이름만 바꿔 윤락을 알선하고 있지만 당국의 단속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종래의 안마시술소는 의료법상 제재를 받아 구청에서 영업 행태와 시설을 정기적으로 점검했다. 하지만 증기탕의 경우 신종 업종이라는 이유로 자유업으로 분류돼 설립 및 운영에 아무 규제가 없는 실정.
이 때문에 업주들은 정기적인 점검을 받는 기존 안마시술소를 폐업 신고하고 너도나도 내부시설을 개조해 증기탕으로 탈바꿈한 상태다.
서울 강남구청 관계자는 “증기탕은 자유업으로 분류돼 업주가 ‘○○ 증기탕’으로 등록하지 않는 한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다”며 “현행법으로는 이들의 설립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도 “증기탕을 단속할 수단은 ‘윤락’밖에 없지만 현장을 적발하기 어려워 단속에 곤란을 겪고 있다”며 “뻔한 일이지만 남녀가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 처벌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연세대 심리학과 이훈구(李勳求) 교수는 “이전에는 치안력과 행정력이 살아 있어 사람들이 법을 지켜왔지만 권력비리가 드러나고 행정력에 누수현상이 심화되면서 일반 시민들의 준법의식도 흐려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조사 전문기관인 R&R의 노규형(盧圭亨) 대표는 “정권이 바뀌면 ‘이제는 달라지겠지’하고 국민들은 기대한다. 그러나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정권의 비리행태를 보고 크게 실망하면서 국민들도 무법심리에 편승하게 된다”고 진단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전문가 진단▼
최근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사회전반의 법 경시 풍조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만의 특수한 레임덕(권력누수) 현상이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치 및 사회제도의 ‘이완’ 정도에 그치는 서구와는 달리 우리의 경우 제도가 해체되는 수준에까지 이를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
한양대 사회학과 김선웅(金善雄) 교수는 “우리의 경우 정권 말기에는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 상황을 통제할 능력이 없어진다”며 “정부 조직 구성원들부터 권력 이후를 걱정하고 심지어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 보신을 위한 줄서기에 급급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수십년간 이런 ‘윗물’의 모습을 보아온 국민들이 정권 말기에 해이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왕배(金王培) 교수는 “오랫동안 권력자들의 비리와 줄서기 문화를 옆에서 보아오면서 시민 대부분이 ‘법은 지키는 사람만 손해’라는 의식을 암암리에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연세대 심리학과 이훈구(李勳求) 교수는 “우리의 경우 권력이 힘이 있을 때는 절대적으로 충성하다가 힘이 약해지면 충성도가 약해지는 현상이 되풀이되어 왔다”며 “위로부터의 레임덕 현상이 아래로 확산되면 ‘지금은 법을 어겨도 강하게 단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고 말했다.
마케팅 및 사회조사 전문기관인 R&R의 노규형(盧圭亨) 대표는 “여론조사 결과 우리 국민들 상당수가 ‘남들은 법을 지키지 않지만 나는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법을 지키는 것은 손해를 보는 일’이라는 이중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노 대표는 “‘법을 잘 지키는 사람만 바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권력 말기에 갖가지 탈법, 편법 행위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서강대 법학과 홍성방(洪性邦) 교수는 “이 같은 준법 의식의 해이는 결국 공무원들의 직업 및 공직 윤리가 느슨해진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며 “정권이 바뀌어도 공무원들이 동요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