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음지]①영구임대아파트 주민

  • 입력 2002년 11월 1일 18시 15분


서울 강서구 가양2동 가양4단지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한 할머니가 비좁은 공간에서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있다.-전영한기자
서울 강서구 가양2동 가양4단지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한 할머니가 비좁은 공간에서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있다.-전영한기자
《가난한 사람들은 모여 산다. 한 푼이라도 집값이 싼 곳을 찾다보니 그렇게 됐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 산동네 판자촌이 이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그러나 산동네는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급격히 해체됐다. 재개발이 이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이들은 이제 영구임대주택, 쪽방, 비닐하우스촌 등에 모여 산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과 함께 이들의 현 주소를 세 차례에 걸쳐 점검하고 대안을 모색해 본다.》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가양2동 가양4단지 영구임대아파트 앞. 하반신이 불편한 주민 김모씨(48)가 만취 상태에서 길에 드러누운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정문에서 과일 노점을 하며 생계를 꾸려왔는데 최근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이 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자 그만 자포자기한 것. 김씨는 2시간이 넘도록 ‘시위’를 벌이다 경찰이 출동하자 그제서야 눈물을 글썽이며 휠체어에 올랐다.

인근 가양2 파출소 정영진 경사는 “이런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소란행위가 잦은 편”이라며 “생활고를 비관해 술을 마신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가양4단지 도시개발공사 영구임대아파트 1998가구에 사는 입주자들은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와 장애인, 소년 소녀가장, 혼자 사는 노인 등이다. 한 달 임대료 3만2000원(관리비 별도)에 실평수 7, 9평짜리에서 산다.

그런대로 살 만하지만 좁아서 불편한 것은 사실. 장애인 박모씨(36)는 “거실과 화장실이 너무 좁아 휠체어가 다닐 수 없고 욕조가 없어 제대로 씻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2298가구의 노원구 월계2동 월계지구 대한주택공사 영구임대아파트.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입주민들은 교육문제가 항상 골칫거리다. 일용직으로 건설현장에 나가거나 식당일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어 교육에 신경 쓸 틈이 없기 때문.

1일 만난 한 입주민은 “밤이 되면 술을 마시고 패싸움을 하거나 본드에 취해 휘청거리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며 “아파트 단지가 불량 청소년들의 집합장소가 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임대아파트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의 자격을 잃은 입주민들을 내보내야 하는 경우. 대부분 “갈 곳이 없다”며 버틴다.

노원구 관계자는 “4인 가족 기준으로 월 평균소득과 가구 재산이 각각 100만원 이상, 3600만원 이상이거나 부양 의무자가 있으면 4년 내에 집을 비워줘야 하지만 강제로 쫓아낼 수 없어 난감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정개발연구원 김수현(金秀顯) 도시사회연구부장은 “기초생활보장 수급 탈락자에 대해서는 임대료를 더 받더라도 거주를 허용하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

또 참여연대 문혜진(文惠珍) 사회인권팀장은 “임대아파트 단지가 ‘슬럼지역’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임대주택에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공존할 수 있도록 장기적으로 평형과 임대료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외딴 섬’ 영구임대아파트. 영세민의 주거안정을 목적으로 대한주택공사와 각 지방자치단체가 1989∼93년에 공급해 서울에만 강서구 1만5275가구, 노원구 1만3615가구 등 4만7054가구가 있다. 정책이 바뀌면서 이젠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다.

입주민들은 여러모로 삶이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장애인과 노인들에게 식사를 챙겨주는 등 ‘산동네 판자촌’ 시절의 따뜻한 마음은 잃지 않고 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황금천기자 kc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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