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高1자퇴 비키 교사 가르치다

  • 입력 2002년 11월 7일 16시 54분


볼살이 통통히 오른 비키는 창업자라기 보다는 대입 시험을 앞둔 수험생 같아 보인다./신석교기자
볼살이 통통히 오른 비키는 창업자라기 보다는 대입 시험을 앞둔 수험생 같아 보인다./신석교기자
《그녀의 이름은 비키 손(19).

비키는 경제 교육 전도사다. “엄마 100원만” 하며 고사리 손을 내미는 코흘리개에게도 비즈니스 마인드를 심어 주어야 한다는 조기 경제 교육론자다.

공식적으로는 10대 경제 교육 전문 회사 아이빛연구소㈜의 공동 창업자이자 커리큘럼 개발팀장.

비키는 10대의 눈높이로 경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대기업이 주최하는 경제교육 특별 강좌에서, 중고교의 경제교육 시간에, 방학 때 비즈니스 캠프를 열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경제 교육을 한다.

10대 비즈니스 교육을 담당할 멘토(mentor) 교육도 비키가 하는 일이다.

멘토들 가운데는 대학생도 있고 초중고교 교사와 교감들도 있다.

가끔은 대학의 교양과목 시간에 강사로 초청돼 청소년 문화에 관한 특강을 한다.》

지난달 숙명여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교양 강좌 때는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최고인데 왜 세계적인 대학은 하나도 없을까’,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왜 대학을 졸업할 때는 취업난에 부닥칠까’ 등의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비키가 파워 포인트로 작성해 조목조목 짚어나간 해답의 결론은 ‘도전과 혁신을 하며 리스크를 감수하고 변화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역동적인 마인드, 즉 기업가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올 2월 중소기업 특별위원회가 중고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비즈니스 스쿨 교원 연수에서는 학생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면서 미국 시카고 대학의 한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실험 대상으로 선정된 교사들에게 영재 학급을 맡아달라고 했다. 실험 결과 교사들은 학생들의 성적이 아주 뛰어났고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실험에 동원된 아이들은 무작위로 뽑힌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이 실험 결과는 여러분이 학생들에게서 천재성을 볼 수 있을 때 학생들이 재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교육이란 학생들에게 단순히 정보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재능을 끌어내는 것이다.”

교육을 ‘업’으로 삼은 비키는 고교 1학년을 마치지 못한 중도 탈락자다. 정식 이력서를 쓴다면 학력란에 ‘중졸’이라고 표기해야 할 것이다.

● 공부만 하던 ‘범생이’ 자퇴선언

비키는 미국 오리건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손동철 교수(단국대 영문과)는 당시 네바다대에 유학 중이었다. 비키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귀국했다. 비키의 국어 실력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수준이었지만 비키의 부모는 일반 초등학교를 선택했다. 외국인학교의 비싼 수업료도 부담스러웠고 한국에 왔으니 한국말을 써야 한다는 단순 명료한 이유 때문이었다.

4학년이 되자 비키의 국어 말하기 실력은 미국에서 살다 왔다는 사실을 친구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늘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쓰기와 읽기 능력도 또래를 따라 잡았다. 비키는 스스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얌전한 학생이었다”고 했고 비키의 어머니는 “전교 석차가 10등을 오르내리는 모범생이었다”고 기억했다.

고교생이 된 비키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해 부모를 놀라게 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대학문이라는 똑같은 목표를 향해 경쟁하는 달리기 시합이 싫다고 했다. 아버지는 한 학기라도 다녀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됐다.

“아빠, 왜 우리나라 산맥의 이름들을 죄다 외워야 하죠?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학교에선 학생들이 바다를 열망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전 꿈이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학교를 다니면서 제 꿈을 잃어버렸어요. 제겐 열망할 만한 바다가 없다고요.”

비키와 아버지는 “비키 정도면 영어만으로도 대학에 갈 수 있다”며 말리는 담임 교사를 뒤로 하고 자퇴서에 도장을 찍었다.

● 美 청소년 경제교육캠프 참가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자 가장 아쉬운 게 돈이었다. 여전히 부모에게 손을 벌려야 한다는 현실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이곳 저곳 일자리를 찾아 보았다. 주유소에서는 “너무 어려 보인다”고, 식당에서는 “힘을 못 쓸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다.

중퇴한 지 6개월쯤 지나 아버지가 비키 같은 자퇴생을 위한 교육기관인 서울시립청소년 직업체험센터(일명 ‘하자’센터)를 찾아냈다. 아버지의 직장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그때까지 충북 천안에 살던 비키는 서울 고모집으로 올라와 하자 센터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비키는 관심을 갖고 있던 웹 프로그래밍 과정을 배웠다.

그리고 2000년 하자센터의 소개로 미국의 청소년 경제교육 단체인 NFTE(National Foundation for Teaching Entrepreneurship)가 스탠퍼드대에서 개최한 여름 캠프에 참가했다. 비키는 그곳에서 2주간 경제의 원리에서 시작해 사업 계획서를 작성해 투자자들에게 프레젠테이션하는 법까지 배웠다. 30명이 참가해 프레젠테이션했는데 이 중 4∼6명은 실제로 NFTE에서 50∼500달러의 사업 보조금을 받았다. 비키는 웹사이트 제작 사업계획을 발표했는데 순위에 들지는 못했다. 당시 1위를 한 친구의 사업 아이템은 ‘출장 미용실’이었다.

비키는 지금까지 왜 이같은 경제 교육을 받지 못했는지 한탄했다. 그리고 청소년을 위한 비즈니스 스쿨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준비 작업으로 지난해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네바다시에서 열린 어린이 경제 캠프 CVC(Camp Venture Creek)의 교사를 뽑는 시험에 응시, 2개월간 캠프에 참가해 교사로 일했다.

● ‘손보혜’서 ‘비키 손’으로

비키는 하자센터에서 인연을 맺은 ‘어른’ 5명과 공동 창업을 했다. 지난해 11월 사업자 등록을 했을 때 자본금은 5000만원이었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의 매출은 3억원 규모다. 비키의 직함은 사업 시작 당시 CEO였다. 하지만 여드름이 송송 난 10대 소녀가, 그것도 ‘비키’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니며 사업 설명을 하자 사람들은 “얘들이 장난하나” “비키? 비키라고?” 하며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즘은 어른들에게 영업을 맡기고 비키는 프로그램 개발과 교육만 담당한다.

비키에게 물었다. 왜 코흘리개들이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가. 비키와 달리 당분간은 스스로 돈을 벌 필요가 없는 모범생들에게도 창업 교육이 필요한가.

“반드시 창업이 목적은 아니다. 비즈니스란 소비자가 사고 싶어하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창조하는 일이다. 사업 아이템을 정하고 그것을 상품으로 실현하는 과정을 통해 창의성을 개발하고 도전 정신과 책임 의식을 키우고 투자자를 설득시키고 생산적으로 생활하는 전 과정을 체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키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름은 왜 비키냐고. 비키는 귀국 후 학교에서 ‘손보혜’라는 이름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자퇴서를 내고 교문을 나서면서 ‘다시는 손보혜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이름을 버렸다. 비키는 미국에서 태어났을 때 부모가 처음 지어 불러준 이름이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남독녀 때문에 맘 졸이면서도 딸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못하게 말린 적이 없는 ‘별난’ 부모는 비키를 늘 비키로만 불러왔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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