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배규한/심판 받아야 할 엘리트들

  • 입력 2002년 11월 14일 18시 14분


정치나 경제를 떠나 사회적으로만 보면 한국은 1970년대까지도 비교적 안전사회였다. 우리는 선진국의 대명사였던 미국에 대해 ‘범죄가 많다’ ‘성도덕이 문란하다’ ‘가족해체 현상이 심각하다’ ‘물질만능주의에 오염됐다’며 한국에 사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사이 그 미국보다 많은 면에서 한국이 더 나빠졌다. 흉악 범죄와 도덕적 타락, 황금만능주의와 인신매매, 불법적 집단행동에 더하여 안전불감증과 사회적 불신 등으로 기본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를 진단할 때 가장 널리 쓰인 말은 ‘사회갈등’ ‘권위붕괴’ ‘신뢰상실’ ‘총체적 위기’ 등이었다. 정치지도자들은 온갖 ‘개혁’과 ‘역사 바로 세우기’ ‘제2건국’ 등을 기치로 내세워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그러나 안정은 고사하고 오히려 위기가 가중되었다. 위기의 근원은 그냥 둔 채 표피적 문제만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모범'은 커녕 위기만 키워▼

그렇다면 한국사회 위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회’란 나약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기 위한 개인들의 집합체다. 사회를 유지하려면 모든 구성원들이 일정한 가치에 합의하고,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며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질서를 형성해야 한다. 그것이 도덕이고 규범이며 법이다.

사회가 위기를 맞는 것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성원들이 사회적 가치와 규범에 혼란을 느낄 때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질서가 변하는 환경에 부응하지 못할 때이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는 이 두 가지가 중첩되어 나타난 것이다. 급격한 사회변동의 와중에서 가치관과 규범은 혼란스럽고 적합성을 잃어 가는데, 급변하는 환경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는 창출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가치와 규범은 어떻게 창출되고 확산하는가. 그것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엘리트들의 역할이다. 이때 엘리트란 반드시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들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지식인이나 경영자 등 사회 각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총칭한다. 한 시대의 가치와 규범은 실로 엘리트 집단의 인식과 태도에 따라 창출되며, 그들의 행동과 수범에 따라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정치 영역이 과도하게 비대해져 정치엘리트 집단이 사회질서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국민에게 무엇을 보였던가. 쿠데타, 권력형 축재, 보스 중심의 파당정치, 술수와 말 바꾸기, 이해타산에 따른 이합집산 등이다. ‘정치꾼’만 난무하고 ‘정치인’은 드물었다. 그렇다고 다른 영역에서 대중적 수범이 되거나 존경을 받는 엘리트 집단도 없다. 위기사회의 근원이 된 불법과 편법, 부정과 부패, 집단이기주의 등은 바로 엘리트 집단의 행태들이 아닌가. 그들만이 행할 때는 소수의 특권이었으나, 구성원 다수가 따라하니 사회적 위기가 된 것이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대선 후보들이 앞다투어 제시하는 ‘바른 나라’ ‘국민통합’ ‘사회개혁’ 등의 구호는 모두 위기사회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단과 처방을 보여준다. 과연 이들은 새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 줄 것인가. 대선 주자들은 불과 40여일 후의 결과에 골몰하지만, 국민은 더 나아가 20년 후의 한국사회를 걱정한다.

▼大選 캠프서 뭘 할건가▼

이른바 대선 캠프에는 수천명의 지식인과 정치, 경제 엘리트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대선 기간은 물론 향후 나라의 새 질서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들이 진정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올바른 정책을 개발하고 대중적 본을 보인다면 사회위기 극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반대로 대선 후의 잿밥에만 관심을 보인다면 또 한번 고약한 모범이 될 것이다. 이들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가는 국민의 감시와 심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위기에서 새 질서가 창출되려면 대중적 수범을 보일 바람직한 엘리트 집단이 형성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의 정치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

배규한 국민대 교수·사회학·객원논설위원 baeku@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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